발전과 평화는 다양한 갈등을 이겨내는 능력, 다원화된 충돌을 융합해내는 데에서…

오늘 우리 시대는 ‘다양화’라는 말로 특징 지을 수 있다. 비슷한 개념으로 에워싸는 말들은 다문화, 다민족, 다원주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을 한국어 사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이 다양성은 서로의 ‘다름’ 서로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갈등과 오해의 불씨’를, 그 불씨가 때로는 ‘활화산처럼’ 주변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파괴성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01_다양성 속의 연합과 조화

특히 현대라는 악명 높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는 갈등을 통해 비로소 의견의 다양성과 각기 다른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희망이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고하게 순결하고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이 원리는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 (롬 8:1-9)에는 다문화 속에서 역동적인 문화교류를 강조하며 선한 영향력으로 상호 문화적, 공동선을 추구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 공동체는 획일성 (formity, oneness) 문화공동체라는 주장을 전적으로 반박한다.

참으로 멋있고 훌륭한 삶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깊이 알고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 – 작게는 가정, 교회, 직장부터 크게는 이민회, 국가, 세계까지- 안에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이 다양성 안에서 연합과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조금 전에 인용한 성서 (롬 8:1-9)에서 사도 바울은 근본적으로 두 종류의 다른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육체의 삶 (life according to the flesh)’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삶 (life according to the Spirit)’이다.

여기서 ‘육체의 삶’은 우리의 옛 생활 방식을 말하며 ‘성령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해석한다. 옛 생활 방식은 이기주의, 자기중심성, 오만함, 이기심 및 완고함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새로운 생활방식은 낮아짐, 겸손, 이타심, 자기 희생 및 복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새로운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생활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의 도를 따르는 삶이다.

 

02_다양성 인정, 가치 존중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AD 58년경)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다문화, 다민족 교회였다. 로마 성도들의 문화적, 민족적, 언어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배경이 다양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문화적 민족적 출신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지고 목양되었다. 그 이후에 여러 이방인들이 합류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서는 유대인 성도들이 대다수를 이루었고 타민족 성도들은 극소수였다.

이 와중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BC 10-AD 54)는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 (행 18:2, AD 49 추측). 그래서 모든 유대인 성도들은 어쩔 수 없이 로마 도시와 로마 교회를 떠나야 했다.

이때 사도 바울 사역의 중요한 동역자 부부인 브리스 길리와 아굴라 부부도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이주하고 바울을 만나 비즈니스 동업자이자 선교의 동역자가 되었다 (행 18:2).

그 이후에 소수의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 성도들이 독점하고 있던 교회의 리더십과 소유권을 차지했다. 또한 이 와중에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교회에 합류했다.

몇 년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후임 황제인 네로 (AD 37-68) 때 유대인 추방령이 풀렸다. (AD 54년 이후)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유대인 성도 중 일부는 로마 교회에 합류했다.

아마도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새롭게 합류한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 교회의 소유권과 리더십 쟁취를 위한 갈등, 대립, 분쟁이 생겼다. 유대인 성도들은 원래 그들에게 속한 교회 소유권과 리더십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방인 성도들은 이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소유권를 주장했다. (롬 11:11-36)

 

03_고상한 명분의 포장

어떤가? 당시 ‘성도’ 혹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며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 여느 집단 못지 않게 갈등, 대립, 분쟁 등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단어가 공동체의 공기를 혼탁하게 하지 않았던가?

놀라지 마시라! 오늘의 교회 공동체를 비롯하여 한 나라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공동체인 대학이나 국가를 바르게 세워보겠노라고 모인 그 나라 최고의 통치 기술자들의 집합체인 국회에서 어디 고상한 스토리만 흘러나오던가?

명심하시라.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었든 크고 작은 갈등은 늘 있게 마련이다. 입에 올리기조차 치사한 것들을 고상한 명분으로 포장하여 상대방을 공격할 때 그 치사한 그 갈등이 상처로 바뀌고 그 상처가 깊어지면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도 눕히면 다리가 된다. 그것도 잘 이겨내면 마음의 다리가 된다. 발전과 평화는 갈등과 충돌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갈등을 이겨내는 능력, 그 다원화된 충돌을 융합해내는 데에서 온다는 사실을!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스대학교 교수·Dean of Korean Language Prog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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