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예찬

지금은 모르지만 내가 고국에 살던 시절 7, 8월 여름이면 신문이나 방송은 ‘바캉스’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가족여행지로 맞춤 한 휴식처를 소개하느라 연일 요란했다.

바캉스 (Vacance)는 프랑스어로서 영어 버케이션 (Vacation)에 해당하는 말로 단순히 ‘휴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7, 8월이면 등장하는 바캉스는 ‘여름휴가’라는 뜻인 거다. 그런데 바캉스는 바다나 산으로 놀러 가는 단어로 잘못 인식됐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특별한 여행지와 특산물과 별미를 소개하면서 호들갑을 떨어댈 때마다 가족과 함께 휴가여행을 떠날 형편이 못 되는 주머니 가벼운 가장은 주눅이 들고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런 가장에게 여름휴가철은 한숨의 계절이었다.

그런데 글쎄,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없지만, 얼마 전부터 여름휴가 때가 되면 한숨과 근심이 많아지는 부류가 주머니에서 먼지만 날리는 가장뿐만 아니라 엉뚱하게 개나 고양이도 그렇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가정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반려동물 어쩌고 하면서 예쁜 옷 사서 입히고, 장난감 사주고, 발톱에 매니큐어도 칠해준다. 헌데 개나 고양이는 옷을 입히지 않아도 계절에 따라 털이 빠지고 자라면서 자연스레 체온관리를 잘한다고 동물학자들이 말했다.

반려동물 광풍은 가축병원 호황까지 몰고 왔다. 함께 사는 개나 고양이가 아프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그들’ 덕분에 수의사가 돈 잘 버는 직업 윗자리에 랭크 되었다. 좌우지간 사람뿐만 아니라 개나 고양이도 팔자가 좋아야 하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렇듯 애지중지 아낌을 받던 개나 고양이가 바캉스 철만 되면 애물단지가 된다. 바다로 산으로 산천경개 좋은 곳으로 가족이 떠나는데 데리고 다니기는 귀찮고, 애완동물 전용 호텔에 맡기자니 숙박비가 장난이 아니다. 품에 안고 다니며 볼을 비벼대던 반려동물은 바캉스 시즌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마디로 골칫덩어리가 되는 거다. 아낌 받던 개나 고양이들은 눈치가 늘어 불안해한다. 여름휴가 기간은 개나 고양이에게 한숨과 공포의 시간이 된 거다.

대한민국에서는 ‘가족’이라면서 함께 살던 개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을 특히 여름휴가철에 버리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국이 유기, 유실 동물의 시기별 발생건수를 분석한 결과 바캉스 계절인 7, 8월에 가장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매년 발생하는 유기동물 숫자는 10만 마리라고 한다.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를 버릴 때는 일부러 집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낯선 곳에 버리기도 한다. 버려지는 동물들은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차가운 죽음을 맞이한다. 차를 피하지 못해 로드 킬을 당하거나, 정처 없이 떠돌다가 부상, 질병으로 죽기도 한다.

생명인 줄 알았는데 가지고 놀다 버리는 노리개일 뿐인 거다. 인간의 더러운 이기심, 냉혹함, 겉치레, 가면, 허례 같은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아 기분 더럽다. 생명 경시다.

그녀는 뉴질랜드에 하나뿐인 매시대학교 (Massey University) 수의대 4학년이다. 수의대는 뉴질랜드 북섬 남쪽 파머스톤 노스 (Palmerston North)에 자리하고 있다. 오클랜드에서 540Km 정도 멀리 떨어진 도시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취하면서 대학생활을 한다. 학기가 쉬거나 방학 때가 되면 가족이 살고 있는 오클랜드로 올라온다. 헌데 집에 와도 편안하지 못하고 불안하다. 함께 살아가는 사랑하는 고양이 두 마리 때문이다.

그녀는 홀로 생활하는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 걔들 먹을 것 챙겨주고, 잠자리 보살펴 주고, 대소변 치다꺼리도 한다.

걔들 나들이하고 돌아올 때를 대비해 창문도 항시 열어둔다. 옆방 동료에게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집에 올라오지만, 그래도 불안해한다. 걔들은 그녀가 방을 비우면 들어오지 않고 거리를 떠돌아 다니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그녀는 홀로 생활하니 먹는 것도 대충 때워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학업에 매진하느라 피곤이 쌓여 얼굴이 핼쑥하다. 지 애비 에미는 방학 동안만이라도 집에서 푹 쉬면서 영양도 보충하고 피곤하고 지친 몸도 추스르고 가라고 하지만 사흘을 머물지 못한다.

고양이 두 마리 걱정 때문이다. 그녀는 고양이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을 허세와 치장의 도구로 삼지 마라. 생명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고귀한 선물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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