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냈으니 받아라

인간 수명이 길게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한 노후를 보내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건강관리부터 재테크 노하우까지 요란하다.

결론은 노후 경제다. 건강관리도 경제가 뒷받침돼야 수월한 일이다. 쉽게 말하면 재산관리 잘 하라는 거다. 노후설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떠들어대는 내용은 늙으면 후회하는 첫 번째가 자식에게 있는 것 다 물려주고 자식에게 얹혀사는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가진 재산은 죽을 때까지 꽉 움켜쥐고 있으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자식들도 부모가 알맞은 때 죽지 않고 계속 늙기만 하면 모시는 것도 힘에 부치고 지겨워진다는 거다. 그럴 때 다 줘버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당신은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다’는 거다. 자식이 못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잘 생각하라고 겁주고 어른다. 우라질!

성리학이니 맹자 공자 같은 이야기는 케케묵은 유물이 돼버린지 오래다. 자식이 가진 것 없는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을 천륜이라고 한다. 천륜이란 뭔가? 부모 형제 사이의 떳떳한 도리를 말한다. 한데 이런 소리를 하면 완전 시대에 뒤쳐진 상투 튼 할배 취급을 받는다. 하긴 내가 현재 23년을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쨌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인간이 변변치 못해 나는 자식들 앞에 흔들어댈 재산이 없다. 사는 날마다 숨가쁘고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빚지지 않고 밥은 굶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왔다. 그나마 이제는 노후연금을 받으니 마음이 다소 편하다.

나라에서 주는 연금 받으면 아들내외에게 얹혀사는 것이 미안해 생활보조비 조금 내놓고 손녀들 용돈 좀 주고 자동차 굴리고 운동하고 술 사 마시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돈을 좀 모아보려고 해보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툭툭 터진다. 구두 밑창이 바스라지고, 자동차가 말썽을 부리고, 치아가 속을 썩이고, 옷들이 삭아 찢어지기도 한다. 주머니 속은 간당간당 한다. 제기랄!

우리 형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두 고학으로 공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완벽한 흙수저의 삶을 살았다. 못 가진 자의 삶은 불편하고 서러운 거다. 힘들게 살아와서였을까? 우리 형제는 낭비를 모른다. 충동구매라는 말은 우리 형제에겐 낯설다.

특히 내 둘째 형님은 절대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 외에는 곁눈도 주지 않는다. 사치품은 언감생심이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도 거의 없다. 마흔 후반부터는 담배와 술마저 끊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이 없다. 나도 돈이 아까와 담배를 끊었다. 술은 안 끊었지만.

내 형님은 검소하게 한 푼 한 푼 악착같이 재산을 모았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재산을 결혼한 자식들에게 넉넉하게 모두 나눠줬다. 그리고 움켜쥔 것 없이 홀로 산다. 봄에는 꽃 구경하고, 여름에는 바다 구경하고, 가을에는 하늘 구경하고, 겨울에는 눈 구경하면서 행복하다.

내 형님은 내가 고국에 나갈 때면 으레 내 주머니 속에 용돈을 넉넉하게 넣어주곤 한다. 받기 힘들어하는 내게 형님은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받아라. 네가 받아야 내가 편하다. 어머니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냐….”

얼마 전 형님이 카톡을 보내왔다. “별일 없느냐. 나는 돈을 버는 것도 없고 연금 받는 걸로 살지만 자식들이 약간씩 보태주니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다. 늙은이가 크게 쓸 돈도 필요 없다 보니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너에게 용돈으로 조금 보냈으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라. 많이 보낼 수도 없으니 형의 성의라고 생각해라. 늙은 형이 언제 이런 마음을 다시 가질 수 있겠느냐. 너무 궁하지 않게 용돈으로 써라. 팔십 다된 늙은 형이 이제 얼마나 더 동생에게 용돈이라고 보낼 수 있겠느냐. 마음 편히 사용하거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노후일까? 그들 말처럼 죽을 때까지 재산을 틀어쥐고 앉아 흔들어야 행복한 걸까? 가진 것 나눠주고 하루하루 마음 가볍게 숨쉬는 노후가 행복한 걸까? 정해진 정답은 없다. 알아서 행복해지면 된다.

형님이 용돈 보냈으니 받으라고 했던 그날, 나는 혼자 생소주를 마시면서 죄스럽고 송구하고 부끄럽고 행복해서 울었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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