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

남자는 혼자서 작은 회사를 꾸려가려 했지만 여러모로 힘에 부쳤다. 잡다한 잔무처리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여자는 낯섦과 외로움에 지쳐갔다. 밤에는 늦도록 혼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아침에는 늦도록 잠잤다. 햇살이 밝은 날 여자는 구인광고를 봤다. 여자는 방세와 와인 살 돈이 필요했다.

남자가 물었다. “급여는 얼마를 원하세요?” 여자가 대답했다. “방세 내고 와인 사고 식비면 돼요.”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욕심이 없으시네요”

남자는 일에 열정적이었고 여자는 일에 성실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고 나면 늘어나는 동종업종으로 회사는 차근차근 어려워졌다. 여자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방세와 최소한의 식비만을 원했다. 그렇건만 남자는 그마저 해결해줄 수 없었다. 회사는 오래지 않아 햇살이 밝은 날 문을 닫았다. 남자와 여자는 햇살이 밝은 날 헤어졌다.

여자는 다시 혼자 밤 늦게까지 와인을 마셨고 아침 늦게까지 침대 속에서 웅크렸다. 또 햇살이 밝은 날, 느닷없이 남자가 여자를 찾아왔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항공권을 내밀었다. “여길 떠나 큰 나라로 가려고 해요.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같이 갈래요?”

남자와 여자는 낯선 나라, 낯선 사람, 낯선 땅에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일거리를 찾아 낯선 거리를 헤맸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얻은 일자리는 자동차 세차장이었다. 남자는 자동차 외부를 닦고 여자는 내부를 청소했다. 자그마한 여자의 손은 자동차 내부 구석구석을 청소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은 늘 짓물러있었다. 여자의 짧은 손톱 밑은 까맸다.

운수 좋은 날 여자는 자동차 내부를 청소하다 1불짜리나 2불짜리 동전을 주웠다. 그런 날 여자는 가슴이 저리고 괜스레 눈물이 났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득히 먼 지평선에 걸려있는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남자와 여자는 삶에 쫓기며 시들어갔다. 팍팍한 삶은 짜증을 불러오고 사랑은 지쳐갔다. 가난이 문틈으로 스며들어오자 사랑이 먼저 알고 창문 틈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여자는 어느 날 심하게 다투고 한밤중에 가방을 꾸려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그곳에 앉아 있을 줄 알았다는 듯 걸어와 말없이 여자를 안았다. 그러면서 남자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 반드시 너를 위해 번듯하게 일어설 거다.

남자는 이민자로서 궁핍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탁상이론이 아닌 자신만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람의 손으로 하는 자동차 세차는 끝날 것이고, 그때면 당연히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남자는 인터넷을 통해 자동차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인터넷을 활용해 자신이 개발한 광택의 장점과 수명을 익혔다. 요트 소유주들이 연락을 했다. 자동차회사 BMW와 벤츠 판매점에서도 연락이 왔다. 남자는 스스로 익히고 터득한 방법을 그들 앞에서 시연했다. BMW에서 정식으로 고용 요청이 왔다. 그날 밤 남자와 여자는 와인을 마시면서 웃다가 울었다.

남자는 BMW 판매점에 출근했다. 여자는 액세서리 판매점에 일자리를 얻었다. 마침내 2개의 침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제법 큰 냉장고도 들여놨다. 와인도 박스로 사다가 쟁였다. 편하게 등을 기대는 소파도 샀다.

궁핍의 시절을 잊지 않았다. 냉장고에 쌓아두었다가 버리는 식품이 없었다. 벌써부터 밥벌이가 제법 괜찮아져 넉넉하게 쇼핑해도 좋으련만, 여자는 절대 1주일 필요량만 쇼핑했다. 밥을 하는 밥솥도 힘들 때 사용하던 냄비 그대로였다.

여자는 냄비로 하는 냄비 밥이 전자밥솥으로 하는 밥보다 훨씬 맛있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전자밥솥을 사는데 드는 적지 않은 돈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을 순간적인 욕구로 구매하는 충동구매를 지웠다.

바람이 우듬지를 심하게 흔드는 날 저녁에 냄비 뚜껑을 열고 보글보글 끓는 밥 상태를 들여다보던 여자에게 남자가 말했다. “냄비 밥 그만하고 자동전자밥솥 하나 사자. 이제 그래도 된다.”

여자는 난생 처음으로 전자밥솥을 샀다. 전자밥솥은 밥을 안치고 손등으로 물량을 가늠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밥솥 안에 필요한 물량이 눈금으로 표시돼 있었다. 밥솥 뚜껑을 닫으면 밥솥이 밥짓기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뜸들인다고도 말했다. 보온한다고도 말했다.

여자가 멀리 사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부지! 나 이제 냄비 밥 안 해. 전자밥솥 샀어. 얘는 지가 알아서 말을 해. 엄청 똑똑해. 글고 아주 편해!” 가난한 아버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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