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반의 영혼

모닝 티 타임을 마치고 새로 온 샘플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줄리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 아들 전화야. 네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내게로 왔어.”

 

사고구나. 주위가 아득해졌다. 겨우 전화를 건네 받는 동안의 찰나였지만 나는 억만년의 시간이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시간에 회사로, 그것도 관리매니저 줄리아한테로 연락이 왔다는 말은 사달이 나도 크게 났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아빠가 엄마한테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요. 비행기 표 빨리 알아봐야 하니까요.”

 

마른 숨을 삼켰다. 분명 나는 안도를 먼저 했다. 순간이었지만 시아버지의 부고를 들으며 아이들이나 남편의 사고가 아닌 것에 마음을 먼저 놓았다. 아주 잠깐이었고 누가 알아챈 것도 아니었지만 전화를 끊으면서 바로 불편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미안함을 넘어선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전화기를 줄리아의 손에 돌려주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냐는 매니저의 질문에 나는 ‘시아버지’라는 영어단어를 생각해 내느라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바로 “My father in law passed away”라고 대답했다.

 

‘법적인 아버지’ 당연한 듯 뱉어냈지만 새삼스러웠다. 아버지란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끈끈한 감정들이 배어 있는가. 그런 ‘아버지’라는 말 앞에 ‘법’이란 틀을 가져다 놓으니 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민망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교차했다. 내게 시아버지는 분명히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가족이었다. 그런데 ‘시’와 ‘in law’와의 사이에 놓여있는 간격은 이상하게 컸다.

 

급하게 한국 가는 길을 알아보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 절차가 복잡했다. 호주 여권 소지자인 나는 발인 전에 도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브리즈번에서 출장 중인 남편만 현지에서 바로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해외에 살면서 부모의 임종과 장례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그리 특별한 이슈가 되는 세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팬데믹 상황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몹시 불편했다. 마음 한쪽이 삼베 조각 같은 것에 쓸리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바로 전, 내 남편과 내 아이의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으로 여겼던 감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불편한 말을 하거나 얼굴을 붉힌 적이 없던 분이셨다. 그것은 돌아가시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한 마음이 심해졌다. 이런 감정을 혼자 감당하기 두려웠던 나는 회사에 남아 이리저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눈물을 훔쳤다.

 

며칠 동안 장례 절차가 가족 단톡방에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나는 성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딸보다도 위에 올려져 있는 내 이름을 발견했다. 낯설었다. 내 현주소를 알려주듯 선명하게 인쇄된 가족의 이름 속에 당당히 박혀있는 내 이름 석 자. 나는 여기 있는데 저기 내 이름으로 올려 있는 저 이는 누구지? 애써 외면하려 했던 맏며느리란 타이틀이었다. 오래 떨어져 살면서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분명히 나로부터 밀어내던 자리였다.

 

시아버지의 장례는 지병이 있던 터라 호상이라고 했다. 출세한 자식들 덕에 화환이 복도 끝을 채우고도 모자라는 호사를 누리고 가셨다고 시어머니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장례식장 한 장면을 전했다. 시어머니 목소리를 듣는데 갑자기 울컥해졌다. 나 혼자 가슴에 쟁여둔 서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복받치듯 올라왔다. 이 또한 예상치 못했던 불편한 감정의 파편이었다.

 

장례가 끝날 즈음에 장지 사진과 함께 낯선 소식 하나가 도착했다. 아주 좋은 곳에 장지를 마련했으며 이곳에는 시부모님 두 분을 포함, 남편과 나, 그리고 작은아들 내외 6명이 묻히도록 설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멍해졌다. 내가 죽은 후에 한국으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한 줌 재로 날려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이 바뀌어서 내 아이들에게 마음 시린 날 한 번쯤 찾을만한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죽은 후에 내가 가야 할 집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마치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고 못을 박듯이 말이다. 여자가 결혼해서 시집에 뼈를 묻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살아생전 묻지 못한 뼈 죽어서 묻는 것쯤이야 하면서도 내가 묻힐 곳이 이렇게 정해지는 건 어쩐지 어리둥절했다. 삼우제에 맞추어 집을 방문한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엄마 죽으면 무덤이 어디 있는 게 좋을까? 한국으로 가면 누가 무덤을 돌보겠어. 나는 너희들 있는 여기에 있고 싶은데….”

“엄마, 여기도 우리 말고 내 자식까지 계속 있을지는 모르잖아요.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엄마가 한국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외할아버지 묘지에 가면 너무 편안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와.”

“슬픔이 위로가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지, 엄마도 너희들 힘들 때 한 줌 흙으로라도 위로가 되고 싶은데…. 나 죽어 한국으로 가야 한다니 새삼스러운 고민이 생겼어. 사후 내 자리가 거기라니. 이상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말이라도 자기 곁에 있으라 하지 않는 아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든다. 공연히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안간힘을 쓴다.

 

“아들, 좋은 생각이 났다. 이러면 어떨까? 뼛가루를 나누는 거야. 시드니에 반, 한국에 반, 그래서 양쪽에 묘지를 만드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그럼 영혼이 반으로 나누어지려나.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마라, 난리 치실 거다.”

 

시아버지 장례 끝에 나는 내 영혼을 반으로 나누어서라도 자식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나와 마주한다. 시아버지 장례에는 참석도 못 한 처지에 말이다.

 

 

유금란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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