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이 추억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난다… ‘할머니, 제 방은 절대 좁지 않아요’

아이는 돌돌 말린 카펫 안에서 죽은 척하고 있다. 엄마는 유괴범이 방으로 들어오자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울부짖는다. 조이라는 여자가 이 방에 갇힌 것은 7년 전 일이다. 그 동안 유괴범과의 사이에서 아들 잭이 태어났다.

 

01_아이가 바라보는 세계

아들이 다섯 살이 되면서 조이는 아이를 그곳에서 탈출시켜야겠다고 결심한다. 트럭 뒤에 실린 잭은 차가 주행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뛰어내려 지나가는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 출동한 경찰은 조이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영화 ‘룸 (ROOM)’의 원작자 애마 도나휴 (Emma Donoghue)는 요제프 프리츨이라는 남자의 범죄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다고 한다. 요제프는 자기 딸 엘리자베스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지하실에 방을 만들어 20년 넘게 가두어놓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원작자 자신도 한 살짜리와 네 살짜리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였다. 그녀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이 갇힌 공간에서 혼자 아이들을 길렀다는 사실에 훨씬 더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감금이라는 극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온종일 아이들과 집안에서 씨름하다 보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밀실 공포증 같은 것을 느꼈다며 엄마와 아이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서로에게 지치지 않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그녀가 ‘룸’을 쓰게 된 실제 동기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들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가능성의 시작이 될 것이다.

 

02_탈출

기본적으로 가구를 제하고는 어른 둘이 앉기에도 비좁은 공간은 잭과 엄마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곳이다. 잭은 엄마의 요리를 돕고 때로는 혼자 설거지도 한다. 엄마는 잭의 키를 재고 침대 위로 구르기와 왕복 달리기를 시킨다. 욕조에서 물장난을 같이 하고 이 닦는 모습까지 세심하게 지켜보는 엄마가 늘 곁에 있다.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모든 가구도 잭의 친구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잤니, 밤에는 잘 자렴, 하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아이가 엄마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갇힌 공간에서 둘이 서로를 벗하며 지루함과 불안을 이겨내는 절친한 단짝의 모습이다. 이렇듯 ‘방’ 은 잭의 세계다. 그러나 관객인 나는 그들이 탈출에 성공해 범죄의 소굴에서 벗어난 것만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었다.

 

03_탈출 이후

죽었다고 생각했던 딸의 옆에 있는 잭의 존재는 조이의 아버지에겐 고통 그 자체다. 아이와 눈이라도 맞춰 달라고 딸이 애걸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 요구를 거절한다. 용맹한 장수가 전장에서 돌아와 자랑스럽게 펼쳐 보인 보물상자가 오물 취급을 받은 것처럼 아버지의 잭에 대한 태도는 예기치 않은 난관이며 혹독한 거절감을 부른다.

자기 혼자 필사적으로 적과 싸우고 있는 동안 친한 친구와 가족들은 아무 탈 없이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라는 자기 연민과 아픈 개를 구하려던 순진함이 도리어 괴한의 덫에 걸리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분하다.

조이는 모든 것이 자기를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던 엄마 탓이라며 급속하게 번지는 피해의식 속에서 괴로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는 심정으로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하지만 그곳에 더 큰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04_하정 투석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말이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질문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이를 사려 깊게 대하던 인터뷰 진행자는 녹화가 시작되자 한결같이 난감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몇 살 때쯤 친아버지의 정체를 밝힐 것이냐는 물음이 그 한 예다. 바늘 끝만큼도 유괴범과 아이를 연관짓고 싶지 않은 조이의 심정을 알면서도 인터뷰 진행자는 어리숙함을 가장해 그녀를 코너로 몰아간다.

호랑이를 막으니 이리가 나온다고 잭을 출산한 후 유괴범에게 아이를 병원 같은 곳에 놓고 와달라고 부탁해볼 생각은 안 해봤냐는 질문이다. 엄마로서는 커다란 희생이지만 아이를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 수 있도록 놓아 줄 생각이 없었냐는 물음이다.

조이는 ‘적어도 아이가 엄마인 나와 함께 있지 않았냐’고 반박해보지만 진행자의 질문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자식의 장래를 빼앗은 간악한 엄마로 조이를 규정짓는다. 사람들이 들이대는 시퍼런 잣대와 불친절한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조이는 자살을 시도하고 병원 신세를 진다.

 

05_잭의 방

잭은 끈 떨어진 연처럼 할머니 집에서 자신의 작은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옷장에 들어가 눕곤 한다. 아이에겐 그곳이 가장 편안한 장소다. 주변 사람들이 세심한 신경을 쓰고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강아지와도 친해지는 기회를 얻지만 엄마가 편안하지 않은 세상, 엄마가 없는 공간에서 잭에게 아직은 여기가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잭이 부엌에서 할머니와 컵 케익을 만들면서 예전의 방이 그립다는 말을 한다. 예상치 못했던 이 말이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를 관객에게 일깨운다. 방을 그리워하는 아이의 심정이 내게 충격적이었다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잭의 할머니가 ‘그런데 그 방이 너무 비좁지 않았니?’ 아이에게 되묻는다. 그 말에 잭이 다시 한번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계를 이야기 한다. 방은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고 끝없이 계속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비좁지 않다고.

 

06_상상 속의 이상한 놀이 법칙

방에서 잭은 보통의 아이들이 접할 수 없는 특이한 법칙 속에서 산다. 일상에서 접하는 냉동 야채나 개미와 쥐 같은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고 아이에게 접할 가능성이 없는 모든 것들, 아이스크림이나 강아지들은 텔레비전 안에서만 존재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이에게 이런 법칙은 결핍이기 보다는 놀이로 작용한다. 사실 비싼 장난감이나 지나친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에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요즘 사람들이 있을까. 그러나 어른들이 놀이의 방법을 제시할 수 없으니 아이들의 방에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어른들은 놀이를 위해 또 무언가를 사러 나간다. 어른들에게도 편하고 익숙한 것이 물건을 사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07_상상력, 문제해결능력

아이들의 놀이문화로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편하지 않은 것은 낭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후딱 돌리듯이 요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놀이들은 대개가 크게 공들이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완성품이 되어 준다.

그것이 커다란 함정인 것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인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많은 공작품들이 풀칠하는 과정도 필요하지 않게 그저 양면테이프 한 장을 뜯어내고 누르면 끝이 난다.

무쿤다 (더 울프팩: The Wolfpack의 주인공)처럼 배트맨 복장을 만들기 위해 삼 년을 공을 들인 아이와 투 달러 숍에서 날림으로 박은 배트멘 복장을 사서 입은 아이와의 차이는 멀어도 너무 멀지 않을까. 요즘 생각이 있는 기업들은 사원을 뽑을 때 자동차를 자기 손으로 고쳐 보았는지 손으로 뭔가를 두들겨 만들어 보았는지에 대한 심사를 한다는데….

 

08_몰입, 놀이의 재미

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 놀이방은 카운슬에서 운영하는 놀이방에 비교해 장난감의 수나 종류가 빈약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곳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놀이에 훨씬 더 집중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놀이의 종류가 적으면 자연히 ‘이게 더 재미있을까, 저게 더 재미있을까…’ 하며 우왕좌왕하는 태도가 줄어든다.

물론 다른 아이의 놀이를 빼앗으려는 아이들도 간혹 있지만 대개의 아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집중한다.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기에게 알맞은 놀이를 발견해서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집중해서 하다 보면 그 놀이를 잘 이해하게 되고 잘 이해한 만큼 자신감이 붙고 그 놀이를 능숙하게 주도해 가기 때문에 재미를 느낀다.

그건 책이든 블록을 쌓든 종류에 상관이 없었다. 놀이방에서 매일 같은 책을 집어 드는 아이가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어서 지켜보니 ‘1000가지 동물에 관한 단어와 그림’이라는 책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와 빼곡하게 책장을 메운 그림들을 들여다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르던 네 살짜리 꼬마 녀석의 무아지경이라니….

 

09_

잭이 엄마를 졸라 예전에 살던 방에 가보는 마지막 장면은 내게 다시 한번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실감하게 한다. 조이를 구출할 때 부서진 문짝이 옆으로 세워진 방은 훤히 열려 있고 그 안으로 잭이 주춤거리듯 들어간다. 방에 들어선 아이는 얼굴이 많이 변해버린 옛 동무를 만난 것처럼 어색해한다.

범죄현장의 증거자료로 채택된 가구들이 빠져나가고 의자와 말라빠진 화분이 싱크대와 칠이 벗겨진 옷장과 함께 버려진 듯이 놓여 있다. 둘이 살고 있을 때보다 더 흉측한 모습이다. 조이는 문에 기댄 채 역겨움을 삼키며 자기와 아이가 지냈던 방을 둘러 보는데 잭이 엄마에게 그 동안 방이 줄어들었냐고 묻는다.

방 안의 불결하고 옹색한 모습에 그 불결함이 몸에 달라붙기라도 할 것처럼 조이는 그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하지만 아이는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 유심히 방 안을 살핀다. 그리고 방이 작아 보이는 것은 문이 열려있기 때문이라고 속삭인다.

‘문을 닫아 줄까?’라고 묻는 엄마에게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방과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받아 들이나 보다. 아이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속삭이듯 친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한다.

이렇게 작았었나… 초등학교의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어른들이 뒤에 남기고 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과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리라. 방을 나서는 잭이 자신의 추억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난다. ‘할머니, 제 방은 절대 좁지 않아요.’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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