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회화의 여명 밝힌 근·현대 화가 7백남준

20세기 최고의 실험적 작가, 현대미술의 새로운 신화 쓴 진정한 아티스트

현대미술의 지평을 바꾸고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32-2006). 그는 “콜라쥬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바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공언하며 캔바스에 국한되었던 미술의 영역을 뛰어넘어 실험적이고도 획기적 인 예술세계를 이룩하였다.

 

01_현대미술 영역 확장은 백남준의 기발한 실험으로 비롯

백남준은 전공은 음악이지만 작곡가, 전위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로 쉴새 없이 새로운 예술세계를 향해 영역을 넓히며, 대중적 매체인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함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시공을 넘어선 동시체험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음악과 비디오의 합성 이미지 결합으로 이루어진 ‘비디오 코뮨’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도였다.

비디오는 시청자를 향해 방송을 송출하는 기능의 기계일 뿐이라는 정의를 깨부수고 그것을 작가의 예술적 수단으로 바꾸어, 미술의 개념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예술이 가야 할 길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미술의 영역이 이토록 확장된 것은 이러한 백남준의 기발한 실험으로 비롯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02_해외 전전하며 켜켜이 쌓인 외로움 깊이 스며들어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무역을 하는 사업가의 아들로 부유하고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고, 철학에도 심취하던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었을 그는 6.25전쟁 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과 독일과 미국 등 타지를 떠도는 보헤미안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후에 그는 이렇게 해외를 전전하며 켜켜이 쌓인 외로움이 뼈가 시릴 정도로 깊이 스며들어 여름에도 내복을 껴입는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것은 물리적인 추위가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그리는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은 심리적 추위였으리라.

 

03_존 케이지와 함께 네오 다다이즘 거장으로

백남준은 도쿄대학에서 예술사와 음악사를 공부한 후, 독일로 건너가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서독 뮨헨대학에서 음악사를 전공했고, 1950년대 후반 퀼른의 일렉트로니셰무지크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중 미국의 전위작곡가 존 케이지와 만나게 되었다.

후에 네오 다다이즘 (전후 기존의 가치나 형식에 도전해 미의 가치를 바꾸려는 미술운동)의 거장이 된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아직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예술을 향해 날아오르게 되는 세기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존 케이지와 함께 작곡과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던 그는 요세프 보이스와 함께 전위미술 그룹 프록서스에 가입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는 예술적 동반자였던 아내 구보타 시게코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 또한 세계적인 미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표지에 작품이 실릴 뿐만 아니라 뉴욕의 현대미술관, 휘트니 미술관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만큼 실력 있는 아티스트였다.

그녀는 남편의 작품 활동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함께 퍼포먼스도 하는 등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부부 아티스트가 되었다.

 

04_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

백남준의 초기작품은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보여지듯 주로 전자음악과 누드 퍼포먼스, 기타를 부순다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등, 기존 가치관의 틀을 부수는 파괴와 성에 대한 획기적인 표현방식으로 이루어진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퍼포먼스이다.

다섯 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액션뮤직이라 부르며, 피아노나 기타를 때려 부수고 머리카락에 페인트를 묻혀 그대로 천에 그리는, 음악과 행위와 미술을 결합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는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이다”라며 예술가는 미래를 사유하고 미리 보고 느낀 미래를 뒤따라오는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 아닐까 싶다.

 

05_예술과 기행 사이에서 비디오아트라는 미술사 새 장르 개척

이후 백남준은 비디오의 표현 가능성을 자신의 새로운 예술표현 방식으로 삼고, 순수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방향을 틀었다. 붓을 들어 캔바스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가 택한 매체는 텔레비전이었다. 예술과 기행 사이의 첨예한 틈 위에서 비디오아트라는 미술사의 새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그는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4대의 피아노와 거꾸로 뒤집히거나 엎어지고 천장에 매달린 13대의 텔레비전, 그리고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머리를 배치했는데, 이는 전후 1950년대에 등장해 온 가정에 보급되어 사회전체의 경제 구조를 바꾸고 사회 시스템에 크나큰 변화를 이룬, 대중의 우상이 된 텔레비전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려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또한 관객이 직접 만지거나 건드리는 행위에 반응하게 함으로, 예술작품이 예술가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가 가능한, 함께 창조해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전시회가 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미술사상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이로 인해 현대미술은 한걸음 더 발전해 ‘공유’라는 또 다른 기능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06_한국 미술계는 어린애 장난 같다는 혹평, 예술작품 아니라는 폄하

그는 1965년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달은 가장 오래 된 TV’에서 변화하는 찰나의 시간들을 정지된 이미지로 잡아 우리에게 순간과 영원 사이에 존재하는 박제된 시간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1970년에는 미국 보스턴의 한 방송국에서 4시간짜리 영상 ‘비디오 코뮨’을 상영했는데, 생방송으로 비틀즈 음악과 함께 비디오 합성이미지를 보여줌으로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가 방송되었다.

1974년 제작된 ‘TV부처’는 동양의 종교적인 정신과 서양문명의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작품으로 부처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화면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불상, TV모니터, 폐쇄회로 카메라로 이루어진 단순한 작품이다.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최초로 팔린 작품인데 네델란드 슈테델릭 미술관이 사갔다.

고요한 명상의 상징인 부처가 현대 테크놀로지에 사로잡힌 모습을 동양과 서양의, 정신과 물질의 교류로 표현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세계의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백남준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항상 새로운 것은 기존의 기득세력에게 배척을 받는 것처럼 권위주위에 물든 한국의 미술계로부터 어린애 장난 같다는 혹평과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폄하에 시달렸다.

 

07_’굿모닝 미스터 오웰’ 발표 후 고국 떠난 지 34년 만에 금의환향

세계 최초의 위성 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1984년 1월 1일 위성을 통해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 서울을 연결해 실시간으로 텔레비전 방송됐다. 30여 팀, 100여명의 예술가가 참여했고, 2500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TV로 시청했다.

미술은 캔바스라는 한정된 2차원적 공간에서 진화되어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였다. 전파라는 날개를 타고 지구를 감싸 실시간으로 예술을 공유하게 만든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한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죠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기계문명의 발달로 생겨난 첨단기기가 ‘빅브라더’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정복당한 인간의 초라함과 위기를 그린 것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기계음으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외치는 입술의 영상으로 매스 미디어가 인간을 정복한 다기 보다는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정보와 소통의 수단이고 세계와 인간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죤 케이지, 탭댄스를 추는 이브 몽땅,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등 여러 예술가가 등장해 현재를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980년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치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달로 전 세계가 실시간 정보를 공유하는 미래를 예견한 듯한 이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주목과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백남준은 고국을 떠난 지 34년 만에 한국으로 금의환향 하였다.

 

08_춤추듯 움직이는 디지탈 선 율동이 하나의 작품 이뤄…

그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필두로 1986년에는 동서양은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키플링의 주장을 반박하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제작하고, 1988년에는 글로벌시대를 상징하는 ‘손에 손잡고’를 제작해 위성 아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위성 아트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1988년 제작되어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나선형 비디오 타워 ‘다다익선’은 높이가 18.5m 지름이 7.5m인 거대한 작품이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TV로 탑을 쌓고 각각 다른 영상이 1003개의 화면 속에 빛나는 작품인데, 여기서 1003의 의미는 개천절인 10월 3일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한다.

많을수록 좋다는 뜻의 다다익선은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공감하는 사회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다.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의 탑 모양을 재현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서양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운 결합을 보여준다.

1991년 제작된 ‘다윈’은 오래된 TV수상기로 만들어진 로봇이 풀밭에서 뛰어 놀고 있는 형상으로 자연과 테크놀로지의 융합을 표현하고 있고, 1998년 제작된 ‘참여TV’는 관람객이 마이크에 소리를 내면 그 음향의 증폭을 TV가 잡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춤추듯이 움직이는 디지탈 선의 율동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 그가 추구하는 공유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09_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또한 백남준 아트센터에 전시된 ‘TV정원’은 처음은 1974년 제작돼 1982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했고,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백남준의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정원’으로 만들어 관객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초록빛 정원의 나무숲 사이사이에 숨어서 빛나는 영상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모습은 정말 멋있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르노와르처럼 다채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록처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전 스크린 캔바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작품들은 이 모든 형용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10_비디오 아트는 백남준의 예술과 놀라운 상상력 덕분

199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열렸고,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2008년에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상갈동 위치)가 개관되었다.

백남준이 생전에 부르기를 원했던 이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인 그곳은 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과 전 생애의 기록, 작품들을 볼 수 있고, 전시회를 비롯해 많은 문화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현대미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미술학도들의 메카가 되었다.

“현대문화에서 비디오 아트가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백남준의 예술과 놀라운 상상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이용한 프로젝트, 설치미술, 행위미술, 공동제작, 새로운 예술도구 개발,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매체 문화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언어를 재해석한 선구자적 존재이다”라고 죤 헨하르트는 말한다

대중매체를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과 대중 사이의 벽을 허물고,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감동을 공유하기를 원했던 백남준. 20세기 최고의 실험적인 작가이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신화를 쓴 진정한 아티스트. 그는 일생 동안 방랑과 도전 속에서 기존가치를 깨트리고 새로운 가치를 예술의 언어로 세우는데 바쳤다. 우리는 다만 그와 동시대에 살며 그가 창조한 새로운 예술이 주는 설렘과 감격에 감사할 뿐이다.

 

* 다음 호에서는 물방울의 작가 김창열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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