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멍…

‘물멍’은 ‘물을 보며 멍 때림’의 줄임말로, 물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불을 보며 멍 때리는 ‘불멍’도 있고 키보드에서 나오는 LED불빛을 보며 멍하니 있는 ‘키보드멍’이라는 말도 있다니 가히 신조어 천국입니다.

요즘은 불멍 하기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가끔 시드니를 벗어나 낯선 곳을 여행할 때 널찍한 마당에서, 혹은 캠핑장 텐트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불멍에 빠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도 불멍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집 거실에 벽난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도 가끔은 내봅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게 허용되지 않으니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있는 동네로 옮겨가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또 용기가 안 납니다.

불멍 못지 않게 힐링을 주는 게 물멍입니다. 다행이 아내와 저 둘 다 낚시를 좋아해서 우리는 가끔 의기투합해 물멍을 즐깁니다. 남들은 낚시도 아니라고 치부하지만 우리는 비치낚시를 즐겨 합니다. 그곳까지 가는 한 시간 남짓의 차 안 데이트로도 이미 행복가득이고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와 눈부신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메가톤급 힐링은 시작됩니다.

거기에 더해 비치에 꽂아둔 두 대의 낚싯대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며 출렁출렁 춤을 주면 엔돌핀까지 팍팍 솟습니다. 남들은 물고기로도 쳐주지 않는 연어 (Australian Salmon)이지만 우리는 녀석들과의 힘겨루기에서부터 짜릿한 흥분을 느낍니다. 게다가 요즘 연어는 생각보다 훨씬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아 기쁨도 두 배입니다.

낚시라는 게 참 신기해서, 던지면 물고 던지면 물고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몇 시간을 물멍을 때리고 있어도 입질 한번 없는 경우도 만나게 됩니다. 실제로 두 시간 남짓 동안 휴식은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스무 마리도 넘는 연어를, 그것도 우리만 계속 잡아 올려서 함께 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지인들과 물고기 나눔을 할 수 있는 것도 물멍 못지 않은 즐거움입니다. 아주 아주 드물긴 하지만 우리가 빈 통으로 올 때는 함께 간 지인으로부터 물고기 나눔을 받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챙김이 있어 기분 좋은 상황입니다.

밤낚시에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물멍과 함께 저 만치에 떠 있는 빨간색 혹은 녹색 찌를 바라보는 찌멍(?) 또한 낭만입니다. 바위 위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일 없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신선놀음 급 낚시를 즐기다가 연어가, 테일러가, 플랫헤드가, 트레바리가, 브림이, 갑오징어가, 한치가, 문어가 물어주면 고마운 거고 그렇지 않으면 컵라면 한 개와 커피 한잔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충분한 힐링을 얻습니다.

가끔씩은 기분을 잡치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고기를 못 잡으면 아쉬움이 남을 뿐이지만 양아치들을 만나면 짜증과 스트레스까지 안고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인 앞으로 똑바로 던지면 될 것을 그러지 않을뿐더러 본인의 찌가 우리 쪽으로 계속 흘러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낚싯줄이 엉키기라도 하면 오히려 난리를 칩니다. 적반하장, 뻔뻔대마왕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싸워봤자 아무 소용 없는 일, 우리가 참고 말지만 정말이지 그런 양아치들은 우리 주변에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보와는 달리 파도가 높아 오징어 낚시가 여의치 않은 상황… 아내와 저는 따뜻한 컵라면과 커피 한잔 그리고 찌멍과 물멍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옆으로 동남아 계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잡았는데 루어낚시 달인쯤 돼 보이는 그는 신기하게도 순풍순풍 한치 세 마리를 잡아 올렸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낚시를 즐기던 그는 자리를 정리하며 우리에게 한치 한 마리를 내밀었습니다. 그가 덩치 큰 한치와 힘겨루기를 할 때 뜰채를 들고 달려가 지원군이 돼줬던 게 고마웠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꽝을 쳤지만 그의 물고기 나눔 덕분에 기분 좋은 물멍을 즐길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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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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