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색 지갑과 침묵

어머니가 무지개 색 예쁜 지갑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 지갑에 20불과 교통카드만 있으니 굳이 힘들게 찾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며칠 전 100불 지전 몇 장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큰일 날 것처럼 ‘이렇게 많은 돈을 외출할 때 가지고 다니면 어떡해요’라고 말했었다.

그때 어머니는 ‘에이, 괜찮아!’ 하며 불편하고 뜬금없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앞에서 은행카드가 있는 별도의 장소로 옮기고 확인시켜 드렸다.

문제는 돈 옮긴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엄마가 괜찮다고 했으니, 아들이 돈을 옮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뿐이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한 어머니, 항상 돈을 쥐고 있어야 평온한 습성. 이 점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런데도 아들인 내가 이 점을 간과한 것이다.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을 동의하지도 귀담아듣지도 않은 것이다. 더구나 기분이 좋아지면 오래된 일들을 잘 기억하며 추억놀이를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억은 급속도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몇 번을 옮겼다고 말했고, 찾을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 다행이다, 잘했네’ 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면 하루 종일 방안 이곳 저곳을 뒤지고 있다. ‘왜 없지?’ 하는 스트레스와 짜증을 표현하며 여전히 자신이 돈을 넣어둔 무지개 색 지갑만 기억하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대한 집착과 과격함도 점점 비례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반복 설명도 이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럴 수 없다는 게 지금의 내 문제이기도 하다. 모자간 (母子間) 구별도 잘 안 된다.

오늘도 지갑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미 교통카드의 사용정지와 분실신고를 했고 열흘 후 시드니 눈 병원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머리엔 여전히 돈 넣어 놓은 무지개 색 예쁜 지갑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생각날 때마다 온 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특히 컨디션이 좋아지는 저녁식사 후에는 아들 전기세 아껴주려 희미한 탁상용 전등만 켠 어두침침한 방에서 왼쪽 눈 하나로 기를 쓰고 찾고 있다.

아들이 못 본 체하고 있으면 분명 서운하고 괘씸한 놈이라며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섭섭해 할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오늘은 방안의 전등을 모두 켜 놓고 함께 찾기 시작했다. ‘불을 왜 켜’ 하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 안 구석구석, 서랍, 지갑, 핸드백, 옷의 주머니… 등을 처음부터 샅샅이 하나하나 방안의 모든 곳을 뒤졌다. 예상대로 지갑은 오리무중이다. 틀림없이 외부의 어느 곳에서 분실했음이 확실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이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더 중요한 자존심까지 무너지고 손상될까 걱정이 들 때쯤 기어코 스스로 쓸모 없는 사람임을 녹음기처럼 반복하신다.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살았어. 바보가 됐나 봐…’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듣고 싶지 않은 정말 싫어하는 이 표현에 나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다. 아직 멀었다.

올해 3월 초 어머니의 자잘한 카드 (펜션카드, 포토카드, 메디케어카드, 시니어카드)의 분실방지와 사용편의를 위해 아들이 보관할 것임을 설명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이후 어머니는 아들이 당신 마음에 안 들거나 언쟁하거나 괘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카드 내놔’ 하고 불쑥 강하게 요구하셨다. 며칠 전에도 ‘내 카드를 왜 아들이 몽땅 가지고 있어? 내놔’ 하고 떼를 썼다.

그때마다 ‘가장 중요한 은행카드는 어머니가 가지고 있잖아요. 자잘한 카드들 분실하고 카드 재발급 신청하려면 영어도 잘 못하는 아들 괴롭힐 일 있어요?’ 하며 한마디로 말문을 막았었다.

그면서도 나름 어머니 은행카드의 분실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은 오늘, 이제는 어머니 은행카드와 교통카드도 아들이 함께 보관할 것임을 선언했다. 만약 은행카드를 잃어버리면 누군가가 ATM으로 가서 즉시 인출할 수도 있음을 자세히 예를 들어 설명했다.

아들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음도 단순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어머니의 모든 카드는 아들 입회 하에 사용하는 중이었다. 매번 필요할 때마다 꽁꽁 숨겨 놓아 기억도 잘 못하는 어머니 핸드백과 지갑과 주머니에서 찾는 시간 낭비와 번잡했던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해드렸다.

무슨 일인지를 알아들으셨을까? 비로소 눈치를 조금은 채신 듯… 갑자기 아무 말씀이 없어졌다. 저녁식사를 끝냈는데도 조용하다. 하루 중 컨디션이 가장 좋은 저녁인데도 그렇다. 보통 때 같으면 뭔가 열 번도 더 해온… 지나간 추억거리들을 꺼내시는데 아직도 침묵 중이다. 어떡하나… 생각은 많아지는데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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