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컴훠니처

시드니에 정착한지 꼭 25년이 되었다. 세 번의 이사와, 실내 분위기를 바꾼다고 이리저리 옮겼던 헌 책장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뿐이다. 꼭 내 모습이다. 최근엔 50인치 티브이를 새로 장만해 책장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튼튼하며 건재하다.

 

상처투성이의 이 책장은 시드니에 정착하여 처음으로 구입한 가구이다. 리드컴훠니처라는 가구점에 들어가, 아침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진갈색의 그 책장을 만났다. 묵직하고 안정감 있게도 보였다. 길이가 1.5미터이니 티브이를 이 책장 한 가운데 올려놓으면 딱 보기 좋을 것 만 같았다, 값도 예상의 범주에 들었다. 가격을 흥정했으나 겨우 운송비를 받지 않겠다는 선에서 결정 되었다. 책장운송은 2-3일 후에 가능하며 도착 전날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가구점을 나오는데, 바로 옆 편에 엄청 넓은 공사현장이 보였다. 넓은 대지에 단층으로 지어지고 있는 ‘버닝스 리드컴점’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보였다. 이곳 시드니에 도착하여 웅장한 규모에 감탄했던 곳이 바로 이 버닝스였다. 이곳은 먹는 것 빼고는, 주거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되어 있는 곳이다. 가까이 가보니 3개월 후, 12월 초에 시드니 지역에서 일곱 번째로 오픈 예정이며 몇몇 파트의 필요 인력을 추가로 뽑는다는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1차 전화인터뷰가 통과되면 2차의 대면 인터뷰를 통하여 선발한다는 내용이다. 필요한 파트는 공구 팀, 목재 팀, 전기 팀이며, 각 파트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나의 관심은 공구 팀이었다.

 

집에 돌아와 예상질문을 생각하며 심호흡 한번하고는 공구 팀 전화번호를 눌렀다. 공구담당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한 남자와 전화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인적 사항 등의 기본 내용을 묻고는 왜 공구 팀을 지원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원래 공구를 좋아하고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도 기계계통에서 일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나는 공구를 사랑한다고 뜬금없는 대답도 했다. 매니저는 그 동안 인터뷰한 여러 사람들과 비교하여 2-3일 내로 면접 일정을 통보하겠다고 했다.

 

3일째 되는 금요일 오후, 소파에 깊게 파묻힌 채로 전화기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굿 에프터 눈, 디스 이즈 리드컴…’ 나는 그 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굿 에프터 눈하며 내 이름을 밝혔다. 상대방은 내일 11시라며 몇 마디 더하는데 나는 기분이 업 되어 ‘오케이! 오케이! 내일 11시!’ 하며 힘차게 전화를 끊었다.

 

토요일 오전 10시, 당신 정말 대단해요 하는 아내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10시 30분이다. 너무 일찍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차 안에서 15분을 기다린 후 들어갔다. 한 여직원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인터뷰 연락 받고 왔다고 하니 그는 오늘 인터뷰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어제 오후에 분명히 오늘 11시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워낙 내가 강하게 말해서인지 나의 이름을 묻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나온 그는 2차 대면인터뷰 명단을 확인했으나 내 이름은 없다고 말한다.

 

짜증난 얼굴로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 들어서니 실내는 어수선하고, 아내의 얼굴은 범상치 않다. 누런 포장지에 감싸인 새 책장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만 하면 척 알아듣는다는 내 강점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한국말이건 어설픈 영어이건 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그리하여 아들과도 소통이 잘 안 되고 가끔은 아내와도 다툼이 일어나는 내 고질적 특징이 증명되었다. 바둑판을 복기하듯, 어제의 전화 내용을 복기했다. ‘여기는 리드컴훠니처입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배송합니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리드컴과 11시라는 목소리만 건지고, 훠니처는 버닝스로 억지로 바꾸고 나머지는 모두 내 맘대로 그냥 소화시켜 버렸다.

 

새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여기 저기 상처뿐인 헌 책장이 한마디 한다. ‘에이그, 25년 살아온 것도 기적입니다. 영어하는 나라에서 그 영어실력으로….’

 

 

장석재 (캥거루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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