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그저 담장나무라고 부르지요
당신의 담장에 어깨를 걸치고 나는 몇 해를 살고 있지요
어린 딸이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잔설 같은 세월이 앉은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면
민들레뿌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마당이 보여요
초저녁 집으로 들어 온 노을을 보던 당신이 문득
내게도 시선을 던지면, 알고 있나요
노을을 데려 온 손이 파르르 떠는 것을
들리지 않는 질문을 던져 놓고
불 켜진 저녁을 봅니다
당신의 어린 딸이 자라는 소리와
당신의 발이 늙어가는 모습과
당신의 시간이 익어가는 사이
밤하늘에 별을 풀어 놓습니다
어제는 마당에서 빗질을 하는 당신을 보았지요
바람이 찬 계절이 되면
관절이 힘을 잃어 늙은 여자의 손 같은 잎들이
눈물처럼 흘러 마당을 덮곤 하지요
당신이 나의 그늘로 살아 내듯
당신의 빗질로 나는 그렇게 또 한 계절을 살아냅니다
나는 그저 당신의 담장나무이지만
그래서 어느 날 나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풍경이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겠지요
박기현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