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 달아 밝은 달아

2019년 기준 한국인 기대수명이 83.3세라고 한다. 아마 지금은 더 늘었을 거다. 오래 전 그 시절에는 부모가 예순이 되면 장수 축하잔치를 열어드렸다. 예순이 지나면 인생은 다 살았다고 해서 예순이 지난 뒤 나이를 ‘남의 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앞으로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는 환갑이나 칠순, 팔순 때가 아니라 상수 (上壽) 때 열어드려야 할 것 같다. 남의 나이의 뜻도 60세 이후가 아니라 100세 이후라고 국어사전을 정정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벌써 오래 전부터 100세 시대니 뭐니 하면서 요란 법석을 떨었으니 기대수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거기에 따른 대비가 필요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래 산다고 춤출 일이 아닌 거다.

내가 100세가 되면 자식들은 70 넘은 노인일 개연성이 높다. 노인이 된 자식이 노인이 돼있는 부모를 부양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부모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하지 못하면 오래 사는 것이 차라리 고통일 수가 있는 거다.

이젠 자식이 부모의 노후생활을 보듬어주는 시대가 아니다. 선진국 어느 나라도 자식이 부모의 주 생활비를 도와주는 나라는 없다. 물론 대한민국에는 민법상 자녀는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 부모가 경제력이 없고 돈을 벌 능력도 없다면 성인이 된 자녀에게 ‘부양료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부양 의무제라고 한다.

부양 의무제는 관습법에 가까운 조항이다. 과거에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도덕법처럼 ‘명시’만 해놓았을 뿐이지 이 조항이 실제로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매년 부양 의무제에 따른 부양료 청구소송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거다.

최근에는 미성년자일 때 학대하고 나 몰라라 했던 부모들이 뒤늦게 자녀를 상대로 ‘부양의무를 이행하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 자녀는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을 제기하는 부모를 만나고 싶지 않으니 방법을 찾아달라고 통사정을 한다는 거다. 그런걸 보면 더럽게 뻔뻔한 부모들도 많지만, 참 치사한 자식들도 많은가 보다.

최근에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의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보고서를 보면, 조사참여 10가구 중 4가구 꼴로 부모 부양의 자녀 책임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다.

“연구팀은 복지패널 6331가구를 대상으로 부모를 모실 책임이 자녀에게 있다는데 동의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부모를 모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에게 있다’는 견해에 대해 반대응답이 40.94%로 찬성대답 23.34%보다 훨씬 높았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35.73%였다.” 이런 조사결과는 소득집단 별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급격한 사회변화로 가족주의가 약화되고 소가족, 핵가족화가 심화하면서 부모부양 가치관이 급변하고 있는 거다. 명절 때 여성이 시댁에 가서 전 부치고 술상 차리는 시대가 아닌 거다.

유교문화를 숭상하며 효 (孝)를 인간근본으로 여겼던 가족관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늙은 부모는 천년만년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퇴색해 이제는 옛말이 되어가는 거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라는 가슴 따스한 전래동요가 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던 달아 /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 / 초가삼간 집을 짓고 / 양친 부모 모셔다가 / 천년만년 살고 지고.

늙은 부모를 모시는 우리네의 아름답고 고운 풍습을 노래한 거다. 그런데 이 동요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 스스로 육신을 건사할 수 없는 삶은 서럽고 욕된 거다. 수명이 늘어남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는 101살이다. 1세기를 넘기고 다시 시작한 삶이다. 그는 여전히 강연을 다닌다. 그는 인생의 사회적 가치는 60부터 온다고 했다. 그때부터 100세 시대에 대비해 정신적 육체적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준비할지는 각자 생각해야 할거다.

나는 자식의 그늘 아래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가족, 핵가족이 자연스러운 뉴질랜드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거둬주는 자식에게 여러모로 미안하고 고맙다. 하지만 자식이 노인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질기게 살아있을까 봐 은근히 걱정 아닌 걱정이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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