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의 기약

꿈틀거리는 중이다. 소금 맞은 지렁이가 움찔하듯 계획이 있으면 꿈틀거리게 된다. 장기근속 휴가를 맞아 오롯이 사계절을 한국에서 지낼 계획이다. 2024년을.

호주와는 정반대로 운행되는 한반도라는 소우주의 시간표에 내 생체리듬이 적응될 수 있을까? 흐드러지도록 찬란하고 현기증 나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면 가녀린 잎사귀들이 연두색이나 옅은 녹색의 옷을 입을 것이다.

동시에 숲이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곧이어 상승하는 기온과 더불어 푸른 숲이 거대한 초록색 덩어리로 변신하는 것을 경이롭게 쳐다볼 것이다. 어찌어찌하다보면 여위어가는 가지들 사이로 청솔모가 도토리를 분주하게 모으는 광경을 보게 되겠지. 그러면서 한반도 대지는 서둘러 가버리는 가을에 누워 하얀 이불을 덮을 것이다.

일단 목적을 부릴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한국의 한 동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스며들고자 한다. 나라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조용히 몸을 웅크린 내가 사는 호주 동네에 비해 한국은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곳이니까.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리 만무한 곳에서 괜히 깐죽거려 봤자 이방인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날 것이 뻔하니. 그래서 내년 한국 행의 테마는 무 목적이다. 나라색이 강한 곳에서 외국생활을 입에 올리는 것은 나에게 큰 모험이 될 수가 있다. 변화가 빈번하고 고집스러울 만큼 인공적인 것을 추구하는 동네에서 억지로 호주에서 몸에 밴 자연적인 컨셉을 내세우다 보면 부러지게 마련이다.

외모가 공공연하게 우선시 되는 곳에서 지금의 앙상한 내 느낌과 달리 두껍게 덧칠하고 의도적으로 앙증맞은 분위기를 더할 생각도 없다.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면 될 성싶다. 내 존재가 조화롭게 얼크러지기를, 목적 없이 배회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런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 눈높이를 도도하게 높일 필요도 없고 치열하게 내 주장을 들이밀 이유도 없는 그런 방문객 말이다.

우리 동네 가까운 산자락에서 수행하는 한국 비구니 스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가끔 들를 때마다 이 분이 손수 만든 청국장을 맛보게 된다. 지켜본 요리방법이 독특하다. 메주콩인 백태를 하룻밤 물에 불린 후 육수에 삶는다. 수 시간을 삶고 나서 손으로 눌러 으깨지면 콩들을 고온에서 이틀 동안 발효 시킨다. 그러면 콩 색깔이 짙어지면서 동시에 콩 사이에 점액질의 실이 생긴다. 발효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 바로 냉동을 하고 청국장을 만들 때마다 한 숟갈씩 꺼내 사용한다. 냉동을 하는 시간이 지체 되면 과발효가 되어 꼬리꼬리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발효시점을 넘어 부패단계로 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양을 같이 하면서 이 분이 항상 되뇌는 것이 이 시점의 중요성이다. 봄꽃과 가을꽃이 숙명적으로 다르듯 부패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과 호주가 다르다고. 남을 속이는 사기나 무고 같은 범죄가 많은 동네에 형성된 도덕성의 기준이 분명 이곳과는 차이가 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이 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시각적 색채와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선명한 옆 선을 구부정한 모양으로 혹은 역광으로 어둡게 보이는 사과를 반짝이는 예쁜 사과로 표현하기도 했던 것처럼.

내가 근무하는 호주 대학에도 노조가 있다. 매년 협상테이블에 오르는 이슈는 적정한 노동시간과 임금인상이다. 최근 호주 대학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는데 노조가 수년 동안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강사들이 정규직이 된 것이다.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매듭이 일시에 풀려버린 것이다.

동시에 나의 강의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평소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얘기다. 비정규직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는 동네에서 섣불리 호주 사례를 들어가면서 논쟁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다만 듣기만 할 것이다.

한국 대학에는 대학원생들이 유독 많다. 높은 학구열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암울한 취업의 어려움이 일조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원 운영에 있어 호주와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논문심사 제도다. 한국에서는 학생이 박사학위 논문을 최종적으로 제출하면 지도교수가 그 연구분야의 권위자들을 심사위원으로 추천한다. 타 대학에서 2인 정도가 들어가면서 나머지 3인 정도는 대개 같은 대학 내 교수들로 위원회가 꾸려진다. 물론 지도교수 본인도 심사위원 일원으로 들어간다.

반면, 호주에서는 반드시 외부 대학에서 논문내용에 대해 잘 아는 학자들로 3인을 지도교수가 추천하게 되어 있다. 그 3인 중에서도 한 명은 반드시 외국 대학 소속이어야 한다. 지도교수가 논문심사에 일절 관여할 수가 없게 운영이 된다. 논문 심사료도 학생이 소속되어 있는 학과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지불하지 한국처럼 학생이 지불하지 않는다. 또한 연구의 결과물로 논문을 집필할 때 공저자가 당연히 들어간다.

그리고 기여도에 따라 저자들 이름의 위치가 달라진다. 기여도가 가장 많은 사람이 제1저자가 되며 연구의 총책임자가 논문 저자목록에 마지막으로 들어간다. 호주 대학에서 부부나 미성년자 자녀들이 논문 공저자로 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이다. 윤리적 논란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간에 합의된 규칙선을 넘을 생각은 없다. 다양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와 언젠가는 기존의 불합리한 불문율이 깨질 때까지 인내할 것이다.

호주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대도시에서 다양한 인종을 접하는 것은 일상이다. 한국거주 외국인이 전체 인구 대비 5%를 넘어가는 이 시점에 한국사회도 빠른 속도로 개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지만 집단주의적 문화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개인의 힘보다는 이해관계가 비슷한 사람과 힘을 합쳐야만 생존이 가능하게 한 측면도 있다. 수년 전 안식년으로 영국에 갈 때 전혀 모르는 등산클럽에 연락하여 도착한 첫 주말부터 영국 시골 구석구석 풍경을 찐하게 만끽한 적이 있다. 이렇듯 일면식도 없는 이방인을 집단의 규범이 찐득찐득한 자신들만의 이너서클에 받아줄 분위기가 한국도 이제는 형성되어 있을까.

오랜세월 고국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살다가 고국으로 잠시 돌아가려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설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년 나의 행적이 정말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박석천 교수의 '따로 또 같이' 여행기 ① 뉴질랜드 북섬, 그 북쪽의 끝을 가다!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박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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