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마침내, 양쪽 눈 정밀검사 결과 ‘우측 눈 치료 불가, 좌측 눈 즉시 수술’로 결정됐다. 10여년의 기다림이었다. 혈압부터 시작해 여러 검사가 끝나자 마취담당의사가 부분마취를 할 거라고 했다.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는 짧은 순간에 잠깐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살아오면서 수술 받는 것이 몇 번째인데도 수술이 편하지는 않다. 여전히 수술하기 위해 이동침대에 눕는 것이 섬뜩하고 불안하다. 전에는 수술이 끝났는데 마취가 안 풀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불안이었는데, 이번에는 수술 도중 마취가 풀리면 어쩌지? 라는 ‘태산이 무너질 어리석은 걱정’이 들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술 한번 받지 않고 곱게 숨지는 사람도 많다는데 내 인생은 참 속 썩이고 거추장스러운 인생인가보다.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했고, 싸움질하다 턱이 깨져 턱 수술을 했고, 뜬금없이 창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복부 수술을 했다. 이제는 수술이라는 것은 끝났겠거니 했더니 이번에는 눈 수술이다.

오른쪽 눈은 홍역과 세상의 혼란이 겹쳐 어쩔 수 없이 제 할 의무를 사보타주하면서 뒤돌아 앉아버렸다. 70년 넘는 세월 동안 오른쪽 눈의 역할까지 대신하면서, 한 눈으로 잘 버텨주던 고마운 왼쪽 눈에 백내장이 끼어들었다고 했다.

백내장은 눈 속의 수정체가 뿌옇게 혼탁해져서 시력장애가 발생하는 거다. 먼 거리는 물론이고 가까운 거리도 형체의 구분이 쉽지 않다. 세상의 풍경들은 안개가 드리운 듯했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은 뿌옇게 흩어진 빛의 파장일 뿐이었다.

5년전, 수술을 위해 시력검사를 받고자 OPSM (Optical Prescription Spectacle Makers)를 찾아갔다. 검안사가 알려줬다. “나라에서 해주는 무료수술을 받으려면 운전하기 위험하다는 정도의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 헌데 당신 눈은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수술을 받으려면 보험에 가입돼 있거나 사비로 수술비를 감당하면 된다.”

나는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다. 당장 수술을 받으려면 사비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 수술비가 적잖은 액수였다. 나는 수술을 포기하고 더 나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내게는 모아둔 돈이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빌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고 주머니 속은 여유가 없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넉넉하게 가지지 못해 때론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당당하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험하고 모진 세상을 빈손으로 살아오면서 누구를 속이지 않았고, 누구를 이용하지 않았고, 누구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오직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밥 먹고 살아왔다. 나는 없으면 굶었고, 없으면 버텼다. 누구에게 손 내밀어 굽실거리며 돈이든 뭐든 빌리는 것을 모른다.

점점 더 나빠지는 눈은 사는 것을 힘들게 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이웃도 지인도 구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람을 모른 체 한다면서 건방지다고 수군거렸다.

수술담당의사는 제구실 못하는 수정체를 들어내고 인공수정체를 끼워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혈관에 무언가 아프게 꽂히고 의사가 뭐라고 했다. 수술실에 참석하길 권유 받은 아들이 통역했다. “눈에 약이 들어가면 통증이 있을 거예요. 통증이 가라앉으면 가라앉았다고 말씀하세요.”

잠시 후 뭔가가 눈 가장자리를 찌르는 것 같았다. 하얀 백지가 눈앞에 펼쳐졌고 검은 형상들이 눈 앞을 어른거렸다. 수술은 노련한 의사의 손에 의해 가볍게 끝났다.

가렸던 눈의 가리개를 풀었다. 먼 산과 들판의 푸른 나무들이 겹쳐지지 않고 하나로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의사에게 말했다. “Can I hold your hand?” 늙은 의사는 미소 지었고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았다.

고개 들어 올려다본 파란 하늘에 낮달이 보였다. 아, 얼마 만인가! 어릴 적 내 가슴속에 꿈처럼 새겨져 있던 낮달이다. 밝은 태양빛에 가려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 희미한 낮달이다. 삶에 힘들어하는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낮달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삶의 환희가 거기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눈부셨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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