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떡

중년이 된 자리에 서서 잠시 지나온 시간들을 들추어봤다.

많은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미국에 살 때도 지금처럼 대도시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살았고 한국 식품을 사러 장거리 여행을 해야 했다.

마치 지나온 인생의 시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 속에 숨어서 현재도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래시계’가 한창 인기 있을 무렵 그나마 고국의 향수를 달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은 식품점에서 대여할 수 있었던 한국 프로그램이 담긴 비디오였다.

어릴 적 만화가게에서 흥분의 도가니 속에 숨죽여 읽어 내려갔던 만화책처럼 밤을 새워 가면서까지 드라마를 보았다.

다음 편을 볼 때까지 상상의 나래를 펴며 기다리던 시간들이 모여서 인내심과 창의력이 길러졌나 보다.

 

어느덧 디지털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과거 일상과는 작별한지 오래다.

하지만 버려야 할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장성한 두 아들의 아기였을 때 모습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난 미련스럽게 안고 있다.

아날로그 식 시절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젊었던 시간들이 현재 진행형이 되어 끊임없이 추억 속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컴퓨터 클릭으로 원하는 한국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국의 생활을 그리며 자주 보는 프로그램에 한 부부의 일상이 그려졌다.

바닷가 근처에 아담한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그런 생활이었기에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졌다. 서로를 천사라고 부르고 그들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 말하며 행복해 하는 미소가 스크린을 넘어 내게도 찐하게 전달 되어왔다.

그런데 왜 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천국이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이곳도 그 어느 곳과 비할 수 없이 충분히 아름다운데….

 

어제는 동네 근처에 살고 있는 직장 동료와 내 차로 같이 퇴근을 하게 되었다. 금요일 오후라 학교에서 지치게 보낸 하루도 가볍게 흘려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녀와 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딸은 하얀 피부색을 싫어해 텐을 정기적으로 받아 갈색 피부색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텐을 받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딸에게서 전화가 왔단다.

또한 그녀는 타고난 자신의 곱슬머리를 싫어해 곧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들이 부러워한다고도 했다.

가끔씩 그녀는 헤어 스트레이 기계로 머리를 쫘악 펴서 나타나 하루 종일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난번 고국방문 때 만났던 이들이 생각났다.

피부를 백옥처럼 하얗게 유지하고 싶어서 햇볕도 보지 않는다는 그들

1일 1팩 (하루에 팩을 한 번씩 하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등을 친구에게서 들으며 한국인들이 피부 미용에 들이는 관심과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로지 미백제품만을 쓰고 있다는 그들의 피부는 여기서 매일 보는 백인들 피부보다 더 하얗다.

호주 시골에서 강렬한 햇볕을 받고 살아온 나의 피부는 그곳에 가니 마치 흑인 피부를 지닌 사람 같았다.

어디 동남아에서 왔다고 해도 넘어갈 갈색 톤이니 말이다.

햇볕을 안보면 어떻게 하냐며 건강이 걱정되어 묻자 비타민제를 복용하면 된다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건강미 없어 보인다고 하얀 피부를 정기적으로 텐을 하고 다니는 백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직모가 싫어 일부러 파마를 하는 지인도 떠올랐다.

우리는 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일까?

불행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주어진 것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항상 떠올려야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최고의 지름길이 아닐까.

 

 

글 / 송정아 (글벗세움 회원·Bathurst High 수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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