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작업화

이제 숨겨야 하거나 낯선 도둑에게 보여주려는 전시용이 아닌…                                            

우리 집 현관 앞에는 깔끔하고 예쁜 신발들이 질서정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2미터쯤 멀리 떨어진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칠고 흉측해 보이는 낡은 작업화 한 켤레가 언제부턴가 홀로 버티고 있다. 출퇴근 때마다 무심코 그냥 지나치면서도 참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끔은 어떤 든든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믿었다.

 

01_18 이민 주물 퍼머넌트로 취업하며 지급받은 작업화

험한 이민생활에 혹시 이상한 좀도둑이 염탐하러 올 경우 흉측한 작업화를 보면 지레 겁먹고 만만하게 보지 못할 거란 생각 때문이다. 강아지 한 마리도 없는 집이지만 그 이상의 무섭고 거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18년 전 이민 후 첫 직장으로 시드니 아타몬의 워먼인터네셔녈 Pty Ltd에 주물 퍼머넌트로 취업하면서 지급받은 작업화인데 3개월 만에 산재로 퇴사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셀 수 없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방황한 끝에 지금의 버스운전 직으로 전직해 근 15년이 다 되었는데도 사용할 일 없이 버리기 아까워 그냥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일을 마치고 회사 대폿 (Depot)에 돌아와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매니저가 불러 세워 샌들 착용에 대해 경고를 날렸다. 순간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면 회사에서 지급하면 되지 왜 개인별 구매를 강요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냥 참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발에 무좀 때문에 슬리퍼를 신고 운전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영어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알겠다”고 웃으면서 말을 했을 뿐이다.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반벙어리 주제에 풀 타임 퍼블릭 시내버스 운전사란 자리가 나에겐 너무도 소중했기에 어떤 문제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굳은 믿음이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02_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신고 다니며 평온함과 따뜻함 만끽하고…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이 작업화를 꺼내어 신고 다녔지만 염려했던 대로 무좀 징후가 생기기 시작했다. 샌들과 작업화를 번갈아 사용하다가 결국은 샌들을 주로 신으면서 작업화는 다시 현관문을 지키고 홀로 서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 들어서부터 갑자기 춥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발이 무척 시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겨울비가 거의 매일 오면서부터 결국은 작업화를 신기 시작했다. 무좀 예방을 위해 발가락 사이에 종이를 넣고 양말은 두 켤레씩 껴 신으니 불편함은 있지만 이게 정말 너무 따뜻하고 느낌이 좋은 것이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작업화를 신고 다니며 평온함과 따뜻함을 만끽하고 있다. 은퇴를 훌쩍 넘겨 근무하면서부터 추위에 약한 내 몸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겨울이 오면서 내 차 트렁크에는 낡은 작업화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더는 현관문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버티고 서있지 않게 됐다. 땀으로 얼룩진 작업화…. 이제 낡은 작업화는 숨겨야 하거나 낯선 도둑에게 보여주려는 전시용이 아니다.

IMF로 갑자기 호주에 날라와서 볼품없이 이곳 저곳을 홀로 기웃거리며 타국의 서러움과 서글픔을 버티다가 당당히 한 남자의 역할을 하는 지금의 내 모습처럼….

 

 

-이민 온 시드니 시내버스운전사

정귀수 (20/05/2019)

 

달리는 차창에

흐릿하게 흐르는

내 모습이

아련히 보인다.

 

여울져 지나간다.

흐릿하게 사라져 간다.

내 청춘이 떠나간다

내 늙음이 성큼 온다.

 

좌우에 녹색나무들이

서있다.

하늘엔 뭉게구름들이

떠있다.

 

운전석 뒤쪽의 승객들이

즐겁게 노닥거린다

미끈한 길을 달리는 내 모습을

차창에서 확인한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수필가·버스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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