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리기는 그 속에 모든 걸 용해시키고 무로 되돌려 보내는 것

물방울의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 (1929~ )은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더 잘 알려진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퐁피두 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톤 현대미술관, 독일 보큠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등 전 세계 유명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01_물방울 안에 자신의 우주 집어넣음으로써 위대한 작품 탄생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동양의 선사상, 노자의 무위사상에서 비롯된 고요한 명상의 세계는 전 세계의 미술인을 감동시켰고, 그는 가장 작고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덧없는 존재인 물방울 안에 자신의 우주를 집어넣음으로써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작품은 마치 캔바스의 천 위로 실제로 물방울이 맺혀있는 듯 한 착시효과를 일으켜 캔바스에 맺혀진 물방울들이 언제라도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은 환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 이며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작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일상의 평범한 한 순간에서 포착된 찰라를 붓으로 표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교함으로 고정시켜, 생생한 실물과도 같은 그 물방울들은 실제보다 더욱 실제 같은 존재감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02_어린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 삼촌 도움으로 남쪽으로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깡촌이라 부르는 송암리에서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다섯 살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붓글씨를 익혔는데, 그가 후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일찍이 종이와 붓을 가까이 했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소학교 시절에는 공부와 그림 모두 뛰어나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었으나, 해방 후 광성고보 4학년이 되었을 때 자습시간에 ‘격문’이라 적힌 전단지에 있는 한자를 따라 적다가 공안에 끌려가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창열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는데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가 학교에서는 영웅이 되었지만, 당국에서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수배를 받고 이를 미리 안 삼촌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달아나야만 하게 되었다.

가족과 헤어져 홀로 알지도 못하는 길을 잡힐까 봐 기차도 못 타고 낮에는 들킬까 봐 밤에만 걸어 6일 만에 삼팔선을 넘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은 것이다.

월남민 수용소에서 6개월을 보낸 후, 기적적으로 미리 월남했던 아버지와 상봉한 그는 다시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니며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해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03_1950-1960년대 작품에는 전후 실존주의 담겨 있어

그러나 평온했던 시절도 잠시, 대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변은 누구에게나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그는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길에는 폭격으로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널려있고, 혼란과 공포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몸을 숨긴 채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중학교 동창은 수십 명이 죽어나가고, 어린 누이동생은 피난지 수원에서 잃었다. 그때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루고, 상처는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할퀴었다고 그는 후에 고백 하였다.

그의 1950-1960년대 작품에는 이러한 전후 실존주의가 담겨있는데, 형태도 없이 두터운 물감을 뭉갠 흔적과 강렬한 색감, 거친 붓 터치로 이루어진 화면이 그의 상처와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상흔’과 ‘제사’는 앵포르멜 기법을 사용한 그의 초기 작품으로, 전쟁으로 인한 주위의 죽음과 혼란, 공포, 그 속에서 소리 죽여 눈물 흘리는 비통함과 상처가 뭉개고 으깨는 유화물감 덩어리와 울분에 차 거칠게 뻗어나간 붓터치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04_1957한국현대미술가협회 결성, 앙포르멜 미술운동 시작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스승 이쾌대 (월북화가)의 조수로 일한 경력 때문에 서울대 복학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할 수 없이 경찰에 들어가 부평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며 계속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1957년 김창열은 박서보, 정창섭 등과 함께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앙포르멜 미술운동 (비정형, 두꺼운 질감과 거친 터치로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작업을 통해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해 일명 뜨거운 추상으로 불린다. 기하학적 추상인 차가운 추상의 반대되는 개념)을 시작해 현대 모더니즘의 기초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많은 젊은 화가들과 교류하며 서구의 현대미술을 연구해, 한국화단이 처해있는 고립성을 타파하고 세계로 향하려는 열정으로 해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발표했다.

이러한 젊은 화가들의 노력은 구태의연한 기존의 화단이나 대중들의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작품 역시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 화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05_시대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서정적 추상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 확립

김창열은 1961년 2회 파리 비엔나레에 초청되고, 1965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나레에도 출품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가있던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초대됐던 김창열은 귀국 행 비행기표를 바꿔 뉴욕으로 향한다.

진로를 서울에서 뉴욕으로 바꾼 계기는 항상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꿈꾸고 세계에서 한국미술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고민하던 그가 미술관을 다니며 직접 대면한 서구세계의 작품에 있는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직접 예술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뉴욕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단돈 4불밖에 없었지만 넥타이공장에서 일하는 등 온갖 잡일을 하며 4년을 버텨냈다.

1966년에는 록펠러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수를 받고, 1966-1968년에는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를 통해 세계 미술계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림에만 매달렸다. 미국에서는 한창 팝아트가 유행하고 하이퍼 리얼리즘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서정적 추상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립해 나아갔다.

 

06_“이 물방울 안에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1969년 그는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비싼 파리의 물가 때문에 파리외곽 빨에조라는 곳의 마굿간을 얻어 아뜨리에로 쓰며 밤낮으로 작품에 매진했다.

이곳은 그에게 인연이 깊은 곳으로 여기에서 프랑스 여인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물방울 작업도 시작하게 된 곳이다. 이 물방울 작업의 계기도 참으로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절 그는 가난해서 캔바스를 마음껏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먼저 그렸던 캔바스를 재활용하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캔바스 뒷면에 물을 뿌렸는데, 물방울에 때마침 떠오르던 태양의 아침햇살이 닿았다. 순간 그에게 뇌를 때리는 창조적 영감이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다. 이 물방울 안에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깨달음이었다.

1972년 파리의 살롱 드 메 초대전에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를 그린 ‘밤의 이벤트’를 출품해 큰 반향을 얻고, 이것을 시작으로 거의 반세기 동안 물방울을 그렸다.

 

07_80년대부터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 극사실적으로 표현

그는 평생 물방울과 배경을 연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초창기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프랑스 신문지 위에 그렸어요. 활자 위에 물방울을 그려 넣으면 더 투명한 느낌이 살아나지요. 흰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 좋아요. 후에 이것이 캔버스로 바뀌었죠.”

물방울이 화면 가운데 몰려 있거나 가장자리로 밀려 떠오른다던가, 물이 길게 흘러내린 자국 끝에 동그랗게 맺힌 물방울 등, 1971년 제작된 ‘현상’ 역시 틈을 비집고 나온 끈적이는 점액질에서 영롱한 물방울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기의 작품이다.

80년대부터 그는 캔바스에서 벗어나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다. 거친 마대가 주는 질감과 그 거친 표면에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의 물방울은 더 이상 물방울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물방울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을 상실한 채 또 다른 존재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여백과 즉물성 (관념이나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실제의 사물에 비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질)을 뛰어넘어 더욱 깊이 들어간 시기이라 할 수 있겠다.

 

08_문자 위의 물방울들… 허와 실, 음과 양, 무한과 유한사상 암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의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표현하려 했고, 물방울 자체도 색채가 들어가고 입체감이 도드라진 형태를 띠운다. 90년대를 수놓은 ‘회귀’시리즈는 천자문을 인쇄체로 쓴 배경과 무리진 투명한 물방울로 진화하게 되었다.

한자가 쓰여진 배경과 그 위에 도드라진 물방울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전혀 이질적인 성질이 만나 이루는 뜻밖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이 색다른 만남이 주는 풍경은 우리에게 물질과 정신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문자 위에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들은 허와 실, 음과 양, 무한과 유한의 사상을 암시한다.

환갑이 지나면서 작품의 제목을 ‘회귀’로 정한 것을 작가는 “환갑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시점인 만큼 그걸 지나면 다시 태어나고, 또 새로 시작하고,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라고 설명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운 그는 유년기의 추억 속에서 글자 하나하나를 추출해낸다. 그렇게 배합한 한자 한자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 그의 삶이 녹아있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진 그의 인생 위에서 물방울은 또르르 구르듯 입체감을 가지고, 긴 세월 동안 녹여낸 모든 감성을 품은 채 무심히 빛난다.

 

09_물방울 속에 삶의 자욱들 담아 멀리 우주로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에서 지나간 30년 동안의 물방울 작업을 재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렸다. 2016년에는 제주도에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어 그의 작품 220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외국생활을 오래했던 그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와 평창동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부딪치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된다. 세상에서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것이 모두 허망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을

채워갈 때가 아니라

비워갈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비워 놓고도

마음이 평화로울 때이다’

 

(남상학의 ‘가벼워지는 연습’)

 

그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투명한 세월의 유리창과도 같은 물방울 속에 삶의 자욱들을 담아 멀리 우주로 보내본다. 그곳에서 발견한 평화와 관조의 세계가 가슴 속 깊이 충만함을 주길 바라며….

 

10_물방울 강조하면 울림이 되고 재질 강조하면 오브제가…

절에서 스님이 마당을 쓸듯이, 염불을 외듯이, 농부가 밭에서 씨 뿌리고 수확하며 일하다 죽듯이, 그렇게 그림 그리다 죽겠다는 화가 김창열. 캔바스를 마주하고 물방울 그리기로 40년을 보냈다는 화가 김창열. 김창열에게 물방울이란 어떤 존재일까?

그에게 있어 물방울이란 순수의 결정이며, 물방울 본래의 성질을 뛰어넘은 절대적인 관념적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물방울 속에 자신의 아픔과 상실, 고통을 녹여내어 마침내 그들과 화해하고 마음속의 평안을 이루는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감정의 혼란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비움의 미학이 그 속에 스며있는 것만 같다.

화가 이우환이 그의 작품에 대해 “물방울을 강조하면 울림이 되고, 재질을 강조하면 오브제가 된다” 고 평한 것처럼 물질성을 상실한 물방울이 갖는 철학적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대중으로서의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물방울이라는 그 작품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모습이다.

자신의 삶의 애환을 갈무리하고 고요한 관조의 세계에 든 작가와의 이해와 소통… 그의 작품을 통해 비움의 미학을 배울 수 있을 것도 같다. 비운다는 것이 단순히 아픔과 상실을 잊는다는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품에 안고 그 안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것. 그 경지를 예술로 승화시켜 물방울 하나에 모든 것을 담아낸 그의 창조적 영감이 가슴 따뜻이 울려온다.

 

* 다음은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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