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칭찬하면 상대방도 칭찬하고 내가 비난하면 그도 비난하게 될 것

미국 <타임> 창간자 헨리 루스의 부인으로 이태리 대사를 역임한 클레어 여사는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숱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람도 하나같이 한 문장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맙니다. 물론 대부분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언어 두세 마디로 그 인생이 요약되고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있지요.

 

01_한 문장, 몇 단어

두꺼운 자서전을 남긴 사람도, 서너 장의 이력서를 훈장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 자서전 내용대로 평가하거나 그 내용을 몇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해서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한두 줄 정도 기억해주지요.

‘훌륭하신 분’들에겐 억울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남긴 명언 한마디 정도나 명저 한 두 권 정도 기억해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하면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분이라거나 ‘흑인 인권 운동의 기수’라는 단 몇 단어로 그 생애가 요약되고 평가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한 시간 이상 침 튀겨가며 칭찬해주거나 장황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만과 편견’이 가득한 말로 ‘낙인 찍어’ 대답하기 일쑤입니다.

“응, 그 사람? 사기꾼이야!” 단 한 문장으로 대답합니다.

“그 사람, 참 웃기는 사람이야!” 역시 한 문장입니다.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 두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믿어도 좋은 사람이야!” 한 문장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분,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야. 그만한 사람은 이제까지 못 만나봤어!” 두 문장 정도입니다.

이처럼 각 사람의 평가에 대한 문장의 내용은 다 다를지라도 분명한 공통점은 단 몇 마디이거나 한 문장이고 길어봤자 두세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억울한 평가를 받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 (The Apostle Thomas, 이하 도마)를 생각해봅니다.

 

02_억울한 도마

오늘날 토마스, 톰, 토미 등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면 좀 친근감이 들겠지요.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도마는 으레 ‘의심 많은’이란 낙인부터 이마에 찍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이러한 낙인이 이마에 찍혔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마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분명히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화를 낼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굉장히 억울해 할 것입니다. 어쩌면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받아 가슴을 치며 밤에 잠도 잘 못 잘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런 억울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갖도록 도움(?)을 준 결정적인 한 구절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요 20:25).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직접 만나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도마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 도마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났는지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제자들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해 손과 옆구리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눈으로 확인한 제자들은 전혀 의심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고 창에 찔려서 돌아가신 그 주님의 부활, 스승의 부활을 믿고 기뻐했습니다. (요 20.20).

여기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도가 주님의 부활을 언제 믿었을까요? 깊이 생각해보세요. 그 시점은 그들이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였습니다. 눈으로 확인한 후에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런 확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03_다를 것 없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제자들과 도마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 전까지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도마의 말이나 다른 제자들이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본 후 믿고 기뻐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 두 부류 사이에 ‘눈으로 확인한 후 믿을 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못 자국을 보고 그 곳에 손가락을 넣고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는 믿을 수 없다.’

이쯤 되면 도마가 달라 보이지 않는가요? 도마의 말이 용기 있게 느껴지지 않는가요? 아무런 위선 없는 이 솔직한 고백이 단지 도마의 개인의 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요?

나아가 우리가 꼭꼭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대신 시원하게 말해주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요? 어쩌면 요한은 다른 어떤 제자들도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솔직하게 반영한 도마의 이 한 마디가 엄청나게 마음의 찔림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려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이런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자 성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런 도마를 두고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 많은 도마’니 하면서 마음대로 정죄합니다. 이를 ‘가혹화의 오류’ 또는 ‘낙인효과’라고 부릅니다. 이런 비슷한 예가 우리의 대인관계 속에서도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요? 내가 칭찬하면 상대방도 나를 칭찬하고 비난하면 그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성경 말씀이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알파크루시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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