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 모습

그날은 생각하지 못한 긴 주말이었다. 영국 여왕이 타계한 후 ‘여왕 생일 공휴일’이 ‘왕 생일 공휴일’로 대체가 되면서 덤으로 얻어진 시간이었다. 묵은 살림살이를 정리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옷 정리 전에 일단 책장에서 오랫동안 자리만 차지하는 책과 서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불현듯 기척이 있어 천천히 돌아보니 낯선 이의 모습이 보인다. 어리둥절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익숙함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40대 적 내 모습이 아닌가. 그 옆에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아내. 온 세상이 자신을 향해 칭송하는 것을 실컷 즐기는 표정이 완연했다. 아내로 인해 내 젊은 시절 모습이 확인 사살되는 순간이었다.

반면 나의 옛 모습은 카메라를 향한 통상적인 미소는커녕 왠지 불만이 가득했다. 도저히 오래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가진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한쪽만 고집을 했을까.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던 풍요를 왜 보지 못했을까. 건강한 처자식을 왜 그다지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후회스럽고 어리석었다는 감정이 쓰나미처럼 가슴을 후빈다.

칼을 그려 넣었구나/제 눈인데요/… (시인 이기린의 ‘칼날’). 미술수업을 할 때 한 학생의 그림을 보고는 시인이 “칼을 그려 넣었구나” 하자 그 학생은 “제 눈인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이 마음에 칼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는 것이다. 눈과 칼 모양이 비슷하여 헷갈렸다고 얼버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눈을 칼로 본 것은 본인 무의식의 발로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들이 곪아 터진 것이다. 잊었다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번 반복되던 패배의식이 차곡차곡 쌓였나 보다. 나의 자존심을 짓밟은 칼날을 감추기가 힘들었을까. 영혼까지 갉아 먹힌 듯한 상처들을 표나지 않게 연기할 수는 없었을까.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는. 나의 옛모습은 천연덕스럽게 너무도 적나라했다.

사실 희미하게 느낀 적이 여러 번 있긴 있었다. 나의 옛 모습이 고개를 기웃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철저히 방치했다. 그럴수록 나는 눈앞의 성취만 좇았다. 소기의 성과들이 수치로 나타나자 나는 가면에 두께를 한층 덧씌웠다. 대중이 보는 무대에서 상을 받고 승진과 명예가 뒤따르면서 나는 가속페달을 더 밟았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거리를 질주할 때 차창에 어른거리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를 전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이런 얼굴을 들이밀며 오늘까지 그나마 지탱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옛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그 모습이 어떤 형태였든 그 당시의 일상이 하루하루 켜켜이 쌓여 집합체가 된 것이다. 올챙이 적 모습을 겪지 않고 개구리로 변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재의 몸뚱이는 이미 늙은 과객인데 옛 모습은 시절을 알아 모든 것을 피어나게 하는 좋은 비였던 것이다.

결국 옛 모습 덕분이다. 소리 없이 내려 내 인생의 구석구석을 적셔준 적시에 나타나 준 반가운 호우 (好雨). 시무룩하게 내뱉었던 한숨들이 인생의 고비마다 먼지처럼 쌓여 있었는데 비로 인해 말끔히 씻겨진 것이다.

먼 훗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겠다. 그림자가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지금 만나야 한다. 물론 어색하겠지. 아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래도 맞닥뜨려야 한다. 너무나도 뒤늦게 후회로 가슴을 쥐어뜯는 때를 피해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앞만 보고 살아온 나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 고맙다 나의 옛 모습!

 

 

박석천 교수의 '따로 또 같이' 여행기 ① 뉴질랜드 북섬, 그 북쪽의 끝을 가다!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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