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추억

마을로 들어가는 양쪽 길의 코스모스의 앙상한 몸이 가을 바람에 휘어진다. 코스모스와 함께 이 길을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순수한 사랑을 키워주었으며, 순박한 꿈이 서리고 애달픈 가슴을 멍들게 한 추억의 길이다. 그 해 겨울방학, 설레는 마음으로 시골집으로 왔다. 외가로 달려가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은 동네 친구들과 등산을 가고, 형준이 오빠도 간다는 정보를 듣는다. 나도 가겠다고 졸랐다. 산이 험해서 여자는 힘들다는 삼촌의 시큰둥하게 던지는 말에 그날 밤, 잠을 설치며 형준오빠와 등산 갈 수 있도록 기도까지 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아침 일찍 외가로 갔다. “오빠들이 데리고 간다고 했어?” 삼촌은 등산 준비로 쳐다보지도 않고 “누가 너를 챙겨주지 못하니까 스스로 알아서 해야 돼!”  삼촌의 볼멘소리를 뒤로하고, 집으로 뛰어왔다. 수선스럽게 뛰어다니는 내게 “너 어디 가니?” 할머니는 물으셨다. “동네 오빠들과 등산가요” “이 추운데 무슨 등산이냐?” 못 마땅 하시며 나가신다. 청바지와 등산복을 입었다 벗었다, 이리저리 거울이 달도록 쳐다보고, 목에 실크 스카프가 신경 쓰였지만 겨울 산이기에 착용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대문까지 나오시며,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대답도 없이 외가댁으로 뛰어갔다. 온통 내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모두들 환한 모습으로 외가댁 마당에 모였다. 잘생긴 형준오빠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근대는 이 마음은 몇 번을 더 봐야 없어질까?  미소로 눈 인사를 하고 겨울 산 등산길에 오른다.  산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음을 말해주듯 길이 번듯하게 나 있었다. 양쪽 길에는, 하얀 눈이 낙엽 위에 소복하게 쌓여 눈꽃송이들이 무리 지어 등산객들을 반겨주고 있다. 산 중턱에 오르니 숨이 찼다. 외삼촌과 동네 오빠들은 내 존재를 잃어버렸는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이 지나 초라 해짐을 느끼는 순간 “쳐지면 더 힘들어져, 일행과 붙어서 걸어야 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동안 형준오빠가 나를 지켜보고 신경 써 주었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상승되며, 심장소리는 더 크게 콩닥거렸다. 일행들 틈으로 몸을 숨겨 나를 향한 오빠의 관심에 신바람이 났다.  동네 오빠들은 대부분 집안 형편이 가난하고, 못 배웠지만 늘 함께하고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형준이 오빠도 형편은 어려웠으나 대학을 다니며 이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 동안 쉽게 올라간 길들이 좁아지면서 왼쪽으로는 낭떠러지 길이어서 위험천만이다. 칡넝쿨을 붙들고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겨울이지만 땀이 흘렀다. “이제부터 험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조심해!” 경험이 많은 성근이 오빠의 안내방송이 메아리 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험한 산새 뚫고 올라서니 우아한 은갈색 갈대가 고귀함을 자랑하며 손짓한다. 칼 바람이 등의 땀을 씻겨주며 몸의 열기와 차가운 공기가 공존하는 느낌이 상쾌하다.  조금 가파른 곳에서 한쪽이 깊이 파여진 길을 만나게 되었다. 오빠들은 칡넝쿨을 잡고 가볍게 올라갔다. 주춤대는 나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어 끌어준 형준오빠로 인해 온 몸의 세포가 깨어 일어나는 전율을 경험한다. 형준이 오빠에게 나를 일임한 것처럼 삼촌과 다른 오빠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오빠의 친절함이 참으로 따뜻했다. 어떤 의미의 감정이 있을까? 오빠의 모습을 훔쳐보지만 어떤 감정도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다. 세찬 바람은 우리를 삼킬 것 같이 강하게 불어왔다. 솜털처럼 하얀 눈을 버너에 담아 녹여서 밥을 지었다. 능숙한 손 놀림은 많은 경험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빠들이 준비한 김치에 라면을 넣었다. 시큼한 김치와 라면이 조합된 냄새는 산자락에 퍼져 나갔다. 모든 미물들이 깨어 일어날 것 같았다. 소주도 꺼내고, 둥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형준 오빠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양파 같은 오빠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술판이 벌어졌는데 옆에 앉은 오빠로 인해 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김치찌개와 라면을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 뭐 길래 이렇게 바보가 되어가는 걸까? 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잔을 부딪치며 쓰다는 소주를 참으로 맛나게 마신다.

세찬 칼바람과 알코올이 모두의 볼을 빨간 사과로 만들었으나, 나는 연모의 불로 양 볼을 지폈다. 모두들 벌개진 얼굴로 추운 겨울바람을 능히 감당하며 즐거워한다. 일행들은 술기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하산을 서두르며 하얀 눈으로 설거지를 했다. 하얀 눈도 어느새 벌겋게 취하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묶으려 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빠가 스카프를 매 주었다. 주위를 보자 모두들 배낭을 메고 시끌벅적 떠들며 내려가고 있다. 머리 좋은 이 오빠가 내 마음을 모두 읽었나? 생각하니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때 확 끌어 않는 강한 손길과 함께 오빠의 입술이 내   겹쳐졌다. 약간 술 냄새가 났던 첫 키스는 산 정상에서 이루어지고 말았다. 가슴은 두 방망이질 쳤으나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연락한 번 없었던 무심한 오빠였다. 두 사람에게는 아니, 나에게는 평생 비밀로 사랑의 추억으로 깊이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코스모스 길을 걸을 때면 누군가와 만나는 기대와 부픈 가슴을 않고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에게 속마음을 토하며, 나의 사랑 나의 추억에 젖어든다.

 

글 / 이병금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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