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우리 부부에겐 아들이 둘 있다. 40년 전이니, 그때만 해도 아들 둘 낳았다고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래도 딸 하나 있으면 했는데 작은 녀석이 태어나면서 꿈을 접었다. 친구 중 장가를 가장 늦게 갔기에 자식 공부시키고 키우려면 더는 안 된다고 결정을 했다. 나름의 가족계획을 세운 거다. 자식 교육 잘 시키려면, 학교 선생 봉급으로 2명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버지 역할과 돈’은 가정과 자식 교육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어머니 삶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게 됐었다. 나는 유소년 전반의 살아오는 과정이 참 복잡했다. 이건 순전히 이들 요소의 부재가 원인이라 믿고 있었고, 내 아내와 두 아들은 절대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딸 부러울 때마다, 묶은 걸 풀거나 입양이라도 해볼까 했던 걸 실천 못 했으니 어쩌겠는가? 그러니 이제, 기다림은 없다.

큰 녀석은 미국 박사 되자마자 한 달 만에 CC로 장가가서 3년 차에 딸 하나 낳고 미국서 자기들끼리 잘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매년 미국과 호주에서 휴가도 함께하며 우리 부부에게 보람과 뿌듯함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화상통화 하면서 손녀 재롱 보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식과 부모 역할 다소 부족하고 서운해도 상호간에 퉁 치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생각 같아 선 ‘아들~! 그냥 호주서 먹고 살면 안 되냐?’하고 싶은데, 요즘 젊은이들에겐 우리와 다른 정서와 꿈이 있고 사생활이 중요한 세대라고 하니 ‘그런가?’ 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함께 먹고 살며 서로 상처도 주고받고 포기와 포용을 배워가는 걸 숙명으로 알고 살아왔다. 당연히 툴툴거리고 씩씩거리며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달라진 세상에도 적응할 수 있어야 순리라 믿고 있다. 그러니 이제, 기다림은 없을 것이다.

작은 녀석은 호주서 대학 나와 세계적 기업 호주지사에서 10년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32살엔 한국지사에서 3년 넘게 이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니 작은아들도 곧 한국 아가씨 만나 결혼도 하고 호주에서 자기들끼리 잘살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림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자식 가진 부모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큰놈은 놓쳤지만, 작은놈은 따로 살더라도 호주에 둥지를 틀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곧 지사장도 되고 장가도 가면 ‘호주 생활 속 손주 보는 재미’를 기대했는데 코로나 19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작년 5월 갑작스러운 사직과 귀국 그리고 2주 격리 후, 은퇴한 나와 함께 집에서 삼식이를 했다. 아빠 말 순종하느라 못해본 ‘갭 이어’ 지금 해본다 했는데, 여행이 불가한 현실에 접하면서 2달 만에 연봉과 회사가 맘에 든다며 일을 시작했다. ‘좀 더 쉬지…’ 했지만 내심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예쁜 처자 사귀며 곧 결혼도 할 거란 기다림이 다시 생겼기 때문이다.

재택근무 6개월 동안 어떻게 주말마다 친구들 만나 놀러 다니나 했다. 그래, 타(祖)국에서 3년 넘게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래도 호주에 왔으니 친구들 만나고 회포를 풀며 좀 놀아야지, 취직도 괜찮게 했는데 했었다. 한 달 전 저녁 외식장소에서 선한 느낌의 처자인사를 받고 너무나 반가웠다. 큰놈도 한번 보여주고 결혼했지만, 이놈도 처음으로 보여주는 거니 ‘이제 곧 결혼하겠구나’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당혹감이 동시에 다가왔다. 그녀와의 의사소통에 아들의 통역이 필요한 외국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사귀는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지자막여부 (知子莫如父) 앞에서 초라해졌다. 더 늦기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아버지 교육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아무래도 ‘그 재미 볼’ 기다림은 접어야 할 것 같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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