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읽는 레시피 / 꽤 괜찮은 여름 밤

겨울 끝 무렵

느릿느릿 게으른 걸음으로 오시는 여름 비

거리에 성근 붓질을 한다

철갑 풍뎅이들 꽁무니마다

진홍빛 꽃이 핀 채 꼼짝을 하지 않고

젖은 바람 라디오 선율 따라 춤을 춘다

제한 속도 90

현재 속도 20

가야 할 길 방향을 잃어

휘청거리는 내 모습 같아

울컥 쏟아지는 눈물

 

왜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은 없다. 뭐가 문제냐 고 스스로 질문해 보아도 답은 처음부터 없다. 단지 제2의 어쩌면 제 3의 사춘기를 앓고 있었을 뿐이다. 무언가 목구멍에 걸린 것만 같았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이 몸 구석구석까지 차 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가 툭 하고 건드리면 멈출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늦은 나이는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다고는 하기 어려운 나이다. 뭔가 도전을 하기에는 인생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지 오래었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에는 아직은 삶이 아쉽다. 생각이 넘치고 넘쳐 머리에 전쟁이라도 날것 같은 날은 사람이 그립다. 같은 마음을 가진 누군가와 술 한잔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넘칠 듯 일렁이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 것만 같다.

 

오늘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남편에게 딱히 뭔가 서운한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다. 남편은 또 다른 나이며 한 몸처럼 생각 하라지만 결국 남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날이 있다.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이 살면서 공감하고 나누게 되는 마음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냥 마음이 좀 그러네 두리뭉실 이야기해도 같이 끄덕거릴 수 있는 친구, 내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해도 말이 나가거나 커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 그러한 친구가 그립다.

 

그러나 친구들은 대부분 너무나 분주하다. 내 또래의 친구들의 자녀들은 대부분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고 아직 부모의 손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친구들은 자녀들의 진로를 위해 정보를 찾느라 귀를 쫑긋거리며 다니고 그네들을 위한 영양식을 하기 바쁘며 학원과 학교 집을 오가며 픽업 인생을 분주하게 살고 있다. 뭐해? 술 한잔 할래? 나올 수 있어? 카톡을 보내면 대부분 비슷한 답변이 날아온다. 팔자 좋은 소리 한다 애들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미안해 애들 시험이 코앞이라 외출이 어려워… 남편이 일찍 들어온 단다 저녁 챙겨야 해…결국 마음이 고픈 나는 혼술을 선택한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술상을 마련하지만 대충 김치쪼가리 올려놓고 소주를 들이켜는 참담한 모습이 되고 싶지는 않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마침 얼마 전 한인 마트에서 사 놓은 막걸리가 눈에 보인다. 아… 저 녀석들이 좋겠군 그렇다면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는 뭐가 좋을까 비님 오시는 날 마시는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 역시 기름 냄새 지글지글 올라오는 전이 좋겠군.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식재료를 꺼내 본다. 배추, 새송이 버섯, 샤브샤브 용 소고기, 스팸과 깻잎 그리고 속재료로 사용할 양파와 당근 쪽파와 마늘이면 준비 완료이다. 먼저 야채들을 다듬는다. 버섯은 물로 씻으면 영양가가 모두 날아간다. 그냥 마른 행주로 아기 목욕시키듯 살짝 닦아준다. 탱글탱글 단단한 갈색 양파를 껍질을 벗긴다. 눈이 시큰 맵다. 이 녀석은 이렇게 맨날 날 울리는 나쁜 친구다. 하얀 배추는 살짝 두드려 펴준다. 소고기는 한장 한장 펼쳐 소금 후추로 밑 간을 하고 스팸은 무참히 으깨어 깻잎으로 납작하게 싸서 준비한다. 부침가루에 계란, 마늘과 양파, 당근, 쪽파를 잘게 다져 넣고 약간 묽다 싶을 정도로 부침물을 만들어준다. 준비된 재료를 부침물을 발라 앞뒤로 뒤집어가며 중약불로 지져주면 된다. 지짐이라고도 하고 부침개라고도 하던데 뭐가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른다. 지짐이든 부침이든 전이든 뭐든 좋다 맛만 근사하다면 말이다. 소스는 달래가 있다면 최고겠지만 시드니에서 달래는 사치다. 잘 부쳐진 전을 기름 종이에 잠시 올려놓는다. 기름종이가 기름기를 좀 흡수해준다 한들 고 칼로리가 갑자기 다이어트 음식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뭐든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누군가의 거짓말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이제 막걸리를 꺼내 온다. 냉장고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동안 녀석은 꽤 차가워졌다. 살살 돌려가며 흔들어 가라앉은 내용물이 충분히 섞이도록 해준다. 흔들지 않고 위에 맑은 술만 따라 마시면 동동주가 된다. 동동주는 숱이 밥알이 동동 떠다니는 맑은 술이고 막걸리는 막 걸러내다는 행동이 변형되어 이름이 된 텁텁한 우유 빛 탁주이다. 어린 시절 아빠가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면 플라스틱 동그란 뚜껑을 살짝 눌러 새어 나오는 막걸리 맛을 보고는 이 텁텁한 신맛을 어른들은 왜 좋아하는 걸까 궁금해하곤 했다.  어느 날은 친할머니가 오셔서 막걸리를 담그고 술찌꺼기에 설탕을 섞어 드시는 걸 같이 먹고 얼큰이 취해 몸이 뜨거워져 차가운 장소를 찾아 책상 밑에 들어가 누워 있기도 했다. 이젠 준비한 안주와 한잔을 마실 차례이다. 시원하게 목젖을 적시며 내려가는 막걸리 맛이 근사하다. 텁텁한 듯 시큼한 듯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듯 소주나 맥주가 가지지 않은 막걸리만의 맛은 그리움의 맛이며 나는 알지 못하는 고향의 맛이기도 하다.

 

창 밖으로 바람에 흩날리며 여름 비 님 오시는 소리가 꽤 요란하다. 음악이 있으면 술 맛은 더욱 깊어질 터이다. 뭐가 좋을까 이런 날은 사춘기 때 들었던 노래가 좋겠군, 이문세 님을 소환해볼까 아니면 가사가 예뻐서 좋아했던 푸른 하늘이나 해바라기…… 아니다 공일오비 노래도 괜찮겠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잔을 들이켜는 막걸리가 시원하게 춤을 춘다. 손으로 쭉 찢어 둘둘 말아 큼직하게 입에 넣어본다, 저절로 눈이 살짝 감겨진다. 외롭다 눈시울 적시던 낮 시간이 까마득하다. 가슴속 쌓인 이야기들을 쏟아버릴 수 없어 답답하던 겨우 몇 시간 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 혼자만 세상 짐을 다 짊어진 듯 힘겨워 비틀거린 시간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글지글 요리를 하고 적당히 마신 막걸리 몇 잔에 난 충분히 행복해한다. 축구를 시청하다가 잠든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음악의 볼륨을 좀더 높여본다. 탁한 음성 그래서 매력적인 들국화 그들이 나에게 노래를 선물해준다. 그래, 꽤 괜찮은 여름 밤이다.

 

 

김은희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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