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때의 행복

“할아버지, 내일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안돼요?” 식품점에서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헤어지려는 순간, 녀석이 제 손을 잡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 그럴까? 엄마랑 얘기해보고… 아니, 내일 낮에 할매할배가 짜장면이랑 탕수육 사 갖고 에이든 집으로 갈 게.”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엄마와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가면서도 연신 돌아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아내와 둘이 식품점에 갔다가 무심코 “에이든 학교 끝날 시간인데 여기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말처럼, 생각처럼 되는 건지, 우리보다 먼저 식품점에 와있었던 에이든과 에밀리가 우리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와 안겼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녀석들을 부둥켜 안고 호들갑을 떠는 우리에게는 그토록 예뻐했던 딸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식품점에서 할매할배를 문득 만난 두 녀석의 품에는 갖고 싶었던 물건들이 다소곳이 안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에이든 에밀리에게 뭔가를 사주는 것도, 녀석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이전처럼 딸아이 눈치(?)를 심하게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주 토요일은 우리에게 빅 데이 (Big Day)가 됐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잠을 단 1분도 못 잔 상태로 아침산행을 마치고, 점심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녀석들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를 본 에이든과 에밀리가 또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격하게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에이든, 넌 요새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좋은 모양이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현관으로 달려오면서 “할아버지!”를 외친 에이든에게 아내가 눈을 살짝 흘기며(?) 한 말입니다. 하긴, 녀석이 요즘 들어 부쩍 저를 좀더 좋아하긴 합니다. 얼마 전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도, 전날 식품점에서 만났을 때도, 그날도…. 녀석에게는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전부이고 최고였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지만 할매할배에 대한 사랑을 주기적으로(?) 골고루 나눠주는 걸 보면 에이든은 어쩌면 ‘밀땅의 고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고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두 녀석은 할매할배의 무릎에 경쟁적으로 앉거나 누워서 재잘거리기도 하고 퍼즐 맞추기나 게임을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녀석들에게 두 시간 정도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에이든, 할매할배 또 초대해줘. 할매할배도 에이든 초대할 게.” 짧은 만남이 많이 아쉬웠겠지만 녀석은 이내 특유의 살인미소와 함께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현관에서의 애달픈(?) 이별… 집으로 돌아오자 간밤에 잠 한숨 못 자고 산행이며, 초대며, 강행군(?)을 계속했던 여파가 몰려왔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에이든과 에밀리를 한번 더 만나고 싶었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너무 심하게 곯아떨어져 녀석들이 온 것도 몰랐을 것 같습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에이든은 우리에게 문득문득 존댓말을 쓰곤 합니다. ‘어른에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엄마아빠의 가르침이 있었던 탓이겠지만 저는 평범한 말 쓰는 에이든 에밀리가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일곱 살 반,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지금부터 어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났을 때는 너무나 작고 소중해서 안아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웠던 녀석들, 눈을 맞추기 시작하면서는 방긋방긋 미소가 너무너무 예뻤던 녀석들,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한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혹시라도 넘어질까 안절부절 못했던 시절의 녀석들… 그리고 이제는 두 녀석 다 어쩌면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녀석들에게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모양과 색깔도 그때그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워낙 정이 많은 녀석들이지만 이제 조금 더 크면 녀석들은 우리의 무릎에 앉지도 않을 것이고 할매할배를 지금처럼 따르고 좋아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그 같은 과정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에이든 에밀리가 주는 그때그때의 행복에 감사하며 그걸 최대한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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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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