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카르텔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임진왜란이다.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은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한심스러운 임금 선조는 백성을 제 몸보다 더 아끼고 지덕체 (智德體)를 갖춘 이순신이 마땅치 않았고 눈에 거슬렸다. 백성들이 자신보다 이순신을 더 공경한다는 사실에 질투와 미움과 불안이 타올랐다. 이순신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를 질시한 세도가 문신들과 무신들은 임금을 부추겼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순신의 명예를 짓밟고 몸에는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수긍해야 하는, 죽여야 할 뚜렷한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계급장 없는 병졸의 신분으로 내쳐졌지만, 임금과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신하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복귀해 남은 12척의 배로 다시 전장에 뛰어들어 나라와 백성을 구한 뒤 스스로 죽어 명예로웠다.

거의 한달 동안 대한민국은 법무부장관 임명 때문에 아수라장이었다. 일본의 심통에 경제는 불안하고, 주변 강대국의 설전으로 안보마저 순탄치 않다는데, 기득권세력들은 국민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 잡기에 사활을 걸고 온 나라를 모략 선동과 함께 ‘카더라’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있다. 익히 잘 알다시피 범죄행위를 저질러도 돈이 있으면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으면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법률소비자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80% 이상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동의한다고 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과 연결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검찰은 철저하게 권력과 손잡고 권력의 앞잡이로, 권력의 사냥개로 자리매김했다. 검찰은 돈 있는 자들을 감싸고, 돈 없는 자들을 핍박해 스스로 돈 가진 자가 됐다. 그들은 권력의 시녀로서 권력을 공유했다. 그들은 정의의 사회가 아닌 불의와 야합과 특권의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검찰은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 행사 및 법원의 판단에 의하여 구체화된 형벌권의 내용 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국가권력이다. 검찰권은 그 법적 성질에 있어서는 넓은 의미에서 행정권에 속한다. 그러나 그 법적 기능에 있어서는 사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독특한 국가권력이다.” 이 국가권력 즉, 검찰권 행사의 주체를 검사라 한다. 막강한 권력의 주체인 검사에 대한 지휘 감독권은 법무부장관이 가지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권력기관개혁을 천명했다. 권력기관개혁의 첫 번째 대상이 검찰이다. 집단과 패거리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검찰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반칙을, 야합을, 특권을 처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검찰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법무부장관부터 ‘이순신’이 요구됐다. 문 대통령은 그 이순신을 흠모하는 ‘조국’을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내정해 국회에 인사청문을 요청했다. 드디어 기득권세력과 검찰은 본색을 드러내며 ‘이순신 죽이기’에 나섰다. 기득권세력은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의 아내, 아들, 딸, 친인척, 조상의 묘까지 훑으면서 조국의 도덕성에 칼을 디밀었다.

검찰은 ‘기레기’들에게 깃발을 쥐어주며 모욕과 선동의 칼춤을 췄다. 그들, 권력의 맛에 쩔은 쓰레기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을 위하여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색칠했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고, 모략과 모멸로 채색했다.

국민들은 불안했다. 허나, 문 대통령은 선조 임금보다 훨씬 더 지혜로웠다. 대통령은 조국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 조국은 몸뚱이에 매를 맞지 않았고 계급장 없는 병졸신분으로 강등되지 않았다. 조국은 임금의 보검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묵묵히 임지로 떠나는 ‘이순신’이었다.

조국은 권력의 카르텔을 깨부숴야 한다. 조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세상에서 지워내야 한다. 조국은 억울하고 못 가진 국민들이 소리치고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신명을 다 바쳐야 한다. 12척의 배로 350척이 넘는 왜선을 깨트렸던 이순신의 총명과 지혜와 용기로 나라와 국민에 충성 해야 한다. 그런 후 스스로 명예로워져야 한다. 이는 고국을 떠나 먼 땅에 사는 어느 이름없는 민초의 기도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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