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안부가 궁금하다

오후 두 시가 다가온다. 대문을 열고 밖을 살핀다. 몇 분이 지났는데 오늘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매일 대문 밖을 살피거나 창 밖을 내다보며 녀석을 기다린다. 애가 탄다. 그때 그토록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 녀석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짙은 크림색과 흰색이 섞인 녀석을 처음 만난 건 코로나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인형처럼 작고 앙증맞은 고양이는 단숨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 집 뒤쪽 담장위로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던 고양이는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사람을 경계했다. 먹을 것으로 유인하며 불러도 절대 다가오지 않았다. 담장 위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아기고양이와 나는 멀찍이서 눈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어쩌다 한번씩 야옹 소리를 내고 급히 가버리지만 녀석의 야옹 소리는 적어도 사나운 발톱을 세우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어린 모습이 언젠가부터 몸집이 커지고 조금씩 변하더니 녀석이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무더위를 피해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아니면 혹시 주인이 있어 이사를 간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비가 오는 날은 더 걱정이 되었지만 차라리 비가 와서 못 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달픈 내 마음은 커져만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담장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가던 어느 날, 같은 무늬의 고양이가 집 앞 정원을 지나 차고 쪽으로 사라졌다. 얼핏 보니 녀석이 맞는 것 같았다. 녀석은 거의 매일 오후 두시 전후로 집 앞을 천천히 지나 사라지곤 했다. 햇살이 따뜻한 어느 이른 봄날,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야옹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익숙한 소리다. 밖을 내다보니 바로 창문 밖 벽돌 받침대 위에 녀석이 자태를 뽐내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대각선으로 마주한 녀석의 성숙한 얼굴과 커진 몸에 놀랍고 당황스러워 다시 확인을 했다. 맞다. 그 사이 녀석은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한층 여유로워진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던 녀석이 먼저 다가온 날이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녀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녀석이 심상찮은 것 같았다. 배가 불룩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만 녀석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녀석이 창문에 매달려 유리를 박박 긁었다. 그 순간 마주친 녀석의 눈동자는 세로로 길었다.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아니, 다가갈 수 없었다.

 

열두 살쯤 되었을 때다. 할머니가 유난히 이뻐한 나는 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짐을 싸 들고 할머니 집에 갔다. 막내 삼촌하고 둘이 살던 할머니 집에 친척 고모가 직장 때문에 같이 살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본 고모와 낯설고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되면서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다 잠들던 시간이 사라졌다. 내 옆에 무섭게 생긴 고모가 누워있어 잠자는 시간이 불편하고 싫어졌다. 할머니는 회색 빛 고양이를 키웠다. 이름은 ‘나비’다. 어린 나에게 나비는 다가가기 어려운 어른 같았다. 살짝 다가가 만지려 하면 할퀴고 찢어지는 소리로 야옹 거렸다. 무섭고 까다로웠다. 할머니 집은 동네 할머니들의 모임 장소였다. 그날도 할머니들이 모여 찐 고구마를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할머니들이 웃으면 함께 까르르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와장창 소리가 들렸다. 방 위쪽을 보니 나비가 장롱위로 올라가다가 하필 고모 화장품 바구니를 떨어뜨린 것이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깨진 화장품 통들과 내용물이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게다가 빨간색 메니큐어로 바구니뿐 아니라 방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비를 야단치려고 다가가자 녀석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변해 있었다. 무서웠다. 뒷걸음쳐 할머니 뒤에 숨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동네할머니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고 할머니는 깨진 병 조각들을 줍고 물든 방바닥을 닦아내느라 한참을 애쓰셨다.

해가 서산 뒤로 사라질 무렵 고모가 왔다. 고모는 방바닥 구석에 있는 화장품 바구니를 보더니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불러 다짜고짜 야단을 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억울했다. 고모의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아까 나비의 눈빛이 오버랩되어 무서움과 서러움이 복받쳤다. 삼촌을 찾아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삼촌은 우는 나를 달래며 서둘러 할머니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고모 이야기를 하며 엉엉 울다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할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다. 고양이가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고양이 눈동자가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던 고양이 갈색 눈동자는 세로로 길었다. 다가가려 하면 날카로운 목소리로 야옹하면서 앞발을 치켜 세웠던 고양이. 할머니는 나비를 절대 방안에는 들어오니 못하게 했음에도 그날 몰래 들어와 사고를 친 나비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그로 인해 전 세계가 열광하던 명작 캣츠의 대표곡 ‘Memory’를 즐겨 듣고 흥얼거렸음에도 정작 뮤지컬 ‘cats’를 볼 수 없었다.

 

몇 십 년 동안 한국과 호주에서 분명 여러 번 고양이를 만난 적이 있을 텐데 내 기억 속 고양이는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 피했거나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많은 시간 지나 만난 이 녀석은 오래도록 굳게 닫혀져 있던 내 마음문의 빗장을 풀게 해 주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 준 고양이와 더 이상의 거리를 좁히지는 못했지만 야옹 소리에 반응을 하며 관심을 갖게 해준 녀석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던 녀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내내 마음 쓰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관심을 갖게 되면 그만큼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내 관심이 적었던 것은 아닌지,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 볼 걸 후회가 된다.

초겨울이다. 따뜻한 봄을 고양이라 노래한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시가 생각나는 날이다. 그 봄을 기다린다.

 

 

최지나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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