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는 사람

첫사랑과 결혼해 금혼식 (金婚式)을 함께한다면 그 사내는 행운아다. 결혼한지 50주년, 반백 년을 함께 살았다. 기념으로 금으로 된 선물을 주고 받는다는 금혼식이다.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미워도 하면서 동고동락 (同苦同樂)한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생각하면 짧지 않은 긴 세월이다.

서로가 때로는 지친 듯, 때로는 무심한 듯, 때로는 실망 짜증 권태 라는 삶의 파고에 당황하면서도 하늘이 정해준 부부라는 고리를 놓지 않은 세월이다.

즐겁고 행복한 날들도 많았을 텐데, 즐겁고 행복한 날들보다 죄스럽고 미안하고 힘겨웠던 날들만 떠오른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의 뇌는 즐겁고 행복한 일들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더 뚜렷하게 기억하는 슬픔지향성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동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보듬고 고학을 했다. 언제나 지치고 외로웠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확실한 대상을 모르는 반항이 시작됐다.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고 헐벗고 불우한 녀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나를 옥죄는 허기지고 아득한 삶은 분노만 쌓이게 했다. 어느 여름날에는 집을 뛰쳐나가 며칠씩 무작정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흘리고 형님의 눈물 속에서 3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동창들은 고3이었고 나는 고1이었다. 걸핏하면 나이 어린 동급생들을 팼다. 여기도 저기도 어울리지 못하는 방황과 원망이 막연한 불안과 반항과 분노로 폭발했다.

대학 재수생이 됐다. 어느 날 새벽 싸움으로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다락방에서 힘들게 눈을 떴다. 눈물이 흘렀다. 불현듯 싸움판을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감싸주는 친구들 덕분에 포크로 손등을 찍는 비교적 가벼운 징벌을 끝으로 불우하지만 마음 따뜻한 싸움꾼들과 작별했다. 재수 끝에 대학에 합격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찬사를 들었다.

대학생활도 고학의 연속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우들은 당구장으로 막걸리집으로 몰려가 우정을 나누고 사랑도 했다. 나는 학우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혼자 술 마시고 혼자 노래 불렀다. 나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난해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항상 혼자였던 어느 봄날 그녀를 운명처럼 길 위에서 만났다. 그녀는 불안한 고학생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희망을 얘기해주고 꿈을 영글게 하는 햇볕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방황과 혼돈의 어둠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이유 없이 손가락질하고 분노하고 울부짖고 침 뱉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아들 딸을 낳아 업고 안고 산으로 강으로 돌아다녔다. 산장이나 텐트에서 깨어난 이른 아침의 안개 자욱한 산속은 천사의 품속이었다. 사는 것이 축복이었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온통 무지개 빛으로 물들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낙원일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나에게 온전한 평안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추운 날 아침, 하늘은 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숨쉬며 노래하고 춤추던 산과 들과 강물은 웃음을 멈췄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 이럴 수가!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악몽을 꾸는 듯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나의 이기심과 교만이 가져온 결과였다.

나는 혼돈 속을 헤맸다. 목적지 없이 헤매고 다니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되어 뜨거운 태양 때문에 세상을 향해 광란의 총질을 할 것 같았다. 다시 살기 위해서는 나를 버려야 했다. 또 다른 강과 산을 찾아서 두려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길이 없는 나의 길이었다.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버겁고 간단치 않다는 것을 몰랐다. 새로운 세상에서도 불면의 밤을 보내며 뒤척거렸다. 그때마다 그녀가 나의 등을 두드리며 다독거렸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우린 참 오래 함께 했다. 낮에는 해 보고, 밤에는 별 보고, 비 오는 날에는 쪼그려 앉고, 바람 부는 날에는 웅크리며 버틴 세월들이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바랄 것도, 새로울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는 하찮게 남아있는 세월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사랑인가? 연민인가? 그렇게 50년 세월을 함께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사랑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아무리 긴긴 세월을 함께 살아도 기대가 지나가면 내가 언제 그대 곁에 있었냐는 듯 쉽게 돌아서는 세상이 돼버렸다는 걸.

그렇지만, 내 곁에는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따뜻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로 곁에 있을 사람! 하늘이 방황하는 나에게 보내준 구원의 은총이었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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