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순환

넌 혹시 결혼을 할지라도 절대로 아기는 낳지 마. 막내동생이 이제 막 꽃다운 이십대로 접어드는 조카에게 마구 쏟아내고 있는 말이다. 우리 엄마는 나와 똑같은 아이를 낳아 내가 엄마에게 했던 것들을 전부 경험해 보아야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 그것은 마치 엄마가 내게 내린 비난과 저주였어. 넌 자식들을 키우면서 내가 느꼈던 걱정, 불안, 애간장이 타 들어가는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넌 너의 인생을 오롯이 마음껏 즐기다 세상을 떠나.

아들만 둔 나로서는 아니, 내게 비록 딸이 있었더라도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자식을 키우면서 느꼈던 희열과 사랑의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것을 이 세상 부모가 되어 본 모든 이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막내동생과는 좀 더 어린 젊은 엄마들을 캠핑 중에 만났다. 캠핑장은 휴가철답게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까지 다녀 보았던 캠핑장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드넓은 호수를 배경에 두고 초록빛 잔디로 뒤덮인 대형 운동장에 카라반 밴과 텐트들이 초승달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텐트를 치기 위해 예약된 곳을 찾아 가보니 어린 자녀들을 둔 가족들이 양 옆에 이웃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조용한 곳으로 옮기려 해도 다른 비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이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하는 수 없이 양쪽에 미리 자리잡고 있던 젊은 부부 가족 소리를 배경으로 텐트를 쳤다. 마치 샌드위치 사이에 마지못해 끼어 있는 치즈 한 장처럼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 보니 애완 동물들과 어린 아이들이 운동장을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다. 또 다른 무리들은 자전거를 타고 캠핑장을 탐험가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들답게 왁자지껄 웃고 노는 모습들을 보니 덩달아 아이처럼 즐거워졌다. 캠핑장을 찾아오는 아이스크림 트럭과 간식 트럭들을 보자 왜 이곳이 가족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곳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워낙 붐비는 캠핑장에 여행객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오밀조밀 붙어 있어서 첫날부터 들려오는 양쪽 가족들의 소리는 자연스럽게 두 가족 생활을 관찰하게 됐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아닌 타인들이 사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이렇게 깊숙한 일상까지 들여다 보게 될 줄이야. 캠핑장 상황이 이러한데 어찌 하란 말인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들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내 귀를 틀어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양쪽 가족들의 대화와 일상생활 모습을 밀착 경험하는 것 같았다.

우리 오른쪽에 있는 가족들의 소리는 부드러운 음악연주 같았다.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는 사랑의 대화들로 그득했다. 귀여운 아이들의 목소리로 부모와 주고 받는 말들이 듣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곳은 배려와 이해하는 마음들로 넘쳐난 화목한 가족 그 자체였다.

반면, 다른 가족은 불평과 불만의 소리들로 가득했다. 어린 아이들은 예의 없게 징징거렸고 그들의 엄마는 입만 열면 짜증난다 (frustrated)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 엄마에 그 아이들이군 참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마침 그 아이와 엄마를 샤워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난 무의식적으로 낯선 이들을 마주칠 때 습관처럼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에게 미소를 지어줄 듯 망설이는 아이의 손을 난데없이 엄마가 낚아채듯 하며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다.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 (Time heals all wounds)’는 명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젊었을 땐 몰랐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서 눈이 떠지고 알아져 간다.

지금까지도 내게 사랑과 애정 보여주기를 멈추지 않는 부모님… 지난 겨울 부모님 집에서 일찍 잠을 깨 창 밖으로 보인 익숙한 풍경이 훅 들어온다. 조용한 아침에 어울리는 첫눈이 세상을 깨우지 않으려고 까치발 한 엄마 발뒤꿈치처럼 하늘에서 포슬포슬 내려 오고 있었다. 아니 그 전날 밤부터 소담스레 내렸나 보다. 세상은 벌써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창 밖을 바라보는 난 그 순수하고 하얀 세상 속에 빠져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눈꽃송이들이 들어온다. 그 어느 눈송이 하나 똑같은 것이 없고 각양 각색의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서 땅 위에 소복이 쌓여만 갔다. 각기 다른 눈꽃송이들, 그들 나름대로의 유일한 모양들과 특성들이 어우러져 우리가 경외시하고 감탄하는 겨울 눈 풍경들을 만들어가는 것을 잠시 보았다.

이 세상에 보내어진 제각기 개성 있는 수많은 눈꽃송이 같은 사람들. 나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수많은 인간들. 그들 나름의 모습대로 아름다운 존재들. 그들이 어우러지고 모여서 비어 있는 이 세상 공간을 채워가는 숨막히게 경이로운 순환이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글 / 송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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