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

“어? 이거, 할아버지 아닌데?” 저의 20대 청년시절 사진을 본 에밀리가 사진 한번 쳐다보고 저 한번 쳐다보고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때의 저는 머리숱이 워낙 풍성해 까치가 둥지를 틀어도 될 정도였습니다. “할아버지, 왜 대머리야?”라는 질문에 “할배가 이제 늙어서 그래. 할배도 옛날에는 머리털 많았어” 하며 옛날사진을 들이밀었던 겁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시작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교실을 급습한 생활지도주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른바 ‘바리깡 테러’를 당했음에도 머리카락을 옆으로 쓱쓱 쓸어 넘기자 고속도로(?)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술(?)이 가능했습니다. 장발이 일반적이었던 대학시절에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캠퍼스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선합니다.

직업병… 직업을 잘못 택한 탓이었는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때문이었는지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머리털을 하나 둘씩 잃어버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 좋던 시력도 나빠져 안경까지 쓰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래도 22년 전 시드니에 처음 왔을 때 457비자를 받기 위해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카락이 제법 많아서 ‘봐줄 만’ 합니다.

하지만 이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도둑맞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누가 뭐래도 완벽한 대머리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한 가지 고백을 더하자면, 몇 년 전부터 저는 ‘전속 이발사’를 두고 있습니다. 미용실에 가도 머리카락이 많지 않은 탓에 채 10분이 걸리지 않아 머리 다듬기가 끝이 납니다.

착한 아내는 햇살 좋은 날 저를 뒷마당 데크에 앉혀놓고 정성스레 머리를 다듬어줍니다. 그때마다 ‘대충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내는 안 그래도 찌질한 남편이 머리카락까지 잘못 자르면 안 될 것 같아서인지 전문 미용사보다 두 배, 세 배의 시간과 공을 들입니다. 물론, 헤어컷 요금은 공짜이고 가끔씩 더해지는 염색까지 무료서비스로 이뤄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둑맞은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닙니다. 한때는 너무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배도 나와서 고민이었는데 세월은 저의 몸무게와 근육까지 훔쳐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 싸이클 선수들을 능가할 정도의 미친(?) 주행으로 탄탄하게 다져져 ‘말벅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허벅지가 얇아지는 데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낍니다.

물론, 일주일에 6일을 운동과 함께 하기 때문에 다이어트(?)의 영향 또한 있겠지만 슬금슬금 도망간(?) 근육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그 놈의 코로나19만 아니었어도 3년 동안 운동을 쉬지 않았을 거고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근육을 가졌을 텐데…”라며 혼잣말을 하곤 합니다.

도둑맞은 근육이야 꾸준한 운동으로 어느 정도 되찾아올 수 있겠지만 집단가출을 한 머리카락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을 만나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머리카락이 적었던 그가 멋진 가발을 쓰고 나타나 10년, 아니 20년은 젊어 보였던 겁니다. 그는 한국에서 가발을 맞춰왔다는데 자신한테 꼭 맞고 전혀 불편함이 없다며 가발예찬론을 펼쳤습니다.

‘그래! 이거다. 나도 한국 가면 가발 하나 맞춰 와야겠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는 다음 날 가발을 맞춰서 시드니로 돌아올 때쯤 찾으면 되겠다는 생각에 가발 잘 한다고 소문난 곳 여러 군데를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발을 향해 한껏 부풀었던 꿈은 얼마 안가 사라졌습니다. ‘막상, 가발을 만들어놓으면 얼마나 쓰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세월이 주는 훈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생긴 대로 살자’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멋진(?) 가발을 쓰고 에밀리에게 “뽐아, 이제 할아버지 대머리 아니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아니, 녀석은 어쩌면 쌩뚱맞은 가발을 쓰고 나타난 할배를 향해 “어? 할아버지 아닌데?”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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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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