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크라이스트처치를 출발해 퀸즈타운 (Queens Town)으로 향하는 버스는 이방인들의 기쁨과 설렘과 잔잔한 흥분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는 버스를 타고 가다 중도에 테카포에서 내려야 했다.
하늘의 바람과, 태양의 빛과, 들판의 소리와, 가람의 짙푸른 냄새를 가슴으로 맞으며 한낮에 도착한 서던 알프스의 동쪽 고원지대 맥켄지 컨트리 (Mackenzie Country)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우며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중에서 중심에 자리잡은 테카포는 해발 710m의 작은 마을로 맑은 공기와 함께 호수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테카포를 향해 산 너머 너머 돌고 돌아 고개 위에 올라서자 눈 아래 호수의 파란 세상이 하늘에 맞닿을 듯 펼쳐졌다. 아! 이 어인 쪽빛이냐!
테카포에는 마을보다 훨씬 큰 호수만 있었다. 마을이 호수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가 마을을 품어 안고 있었다. 아니, 마을 한쪽 귀퉁이를 베고 호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었다.
호수는 푸르른 물빛으로 단장하고 낯선 나그네를 향해 안녕이라고 인사하듯 잔잔한 물결을 출렁거렸다. 쪽빛에 우유를 풀어놓은 듯한 물빛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 ‘밀키 블루 (Milky Blue)’였다. 빙하 녹은 물에 주변의 암석 성분이 녹아 들고 그 물이 호수로 흘러 들어 밀키 블루라는 부드럽고 은은한 물빛이 된 것이라고 했다던가.
테카포 호수는 ‘큰 바위 얼굴’처럼 만면에 푸근한 미소를 띄우며 인자하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팔 벌려 누구라도 맞이하고 있었다. 한낮의 호수에는 푸른 하늘과, 하얀 조각 구름과, 높은 산봉우리도 잠겨 있었다.
그는 배낭을 벗어놓고 호수 곁에 주저앉았다. 자신도 호수 속으로 잠겨 들기를 바라면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지치고 고단한 늙은 맨발을 호수 속에 담갔다. 호수의 물들은 어디서 흘러와 이리 모여 있을까. 홀로 올 땐 무색인데 이리 모이면 어찌해 쪽빛보다 더 푸르러지는 걸까. 제 색깔을 버리고 모이면 이렇듯 아름답고 찬란한 색깔을 엮어낼 수 있는 것일까?
붉은 태양이 먼 산 뒤로 숨어버리자 놀랍게도 밝고 둥근 달이 떠올라 호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호수는 은빛 세상을 연출했다. 그는 낯설어 잠 못 이루는 밤 벌레가 되어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호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삶에 지쳐가는 그의 쭈글쭈글한 몸뚱이와 루게릭병을 앓듯이 점점 굳어져가는 그의 넋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사랑의 세상에 어쩔 줄 모르다가 어물어물 신음 같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고 말았다.
훌쩍이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호수가 가만가만 속삭였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상이 있지요. 당신의 눈으로만 남들을 보지 마셔요.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만이 온전한 세상은 아니지요. 당신의 세상이 다른 사람의 세상과 섞이고 녹아 들어 우리의 세상을 만드는 거지요. 당신의 세상을 고집하지 마셔요. 고집을 버리면 이처럼 사랑스런 호수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은 호수의 한 방울의 물방울일 뿐인 거여요.’
달빛 덮은 호수 위로 깊고 부드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수 위로 총총한 별들이 쏟아졌다. 그랬다 테카포 호수의 물들은 혼자이면서 함께였다. 테카포 호수는 자신을 던져버리는 섞임이었다.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이해하지도 이해 받지도 못하는 편협한 자기만의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져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새벽 하늘이 희붐해졌다. 바람이 그를 흔들었다. 그는 그의 작은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호수 마을의 기념품점에는 파란호수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여자가 좋아하는 쪽빛 목걸이를 골랐다. 버스에 오르며 테카포 호수를 뒤돌아 봤다. 그와 호수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문득 그는 충동적으로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의 시 구절을 떠올렸다.
천공 (天空)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 춤추게 하라 / 함께 있음에도 거리를 두라 /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 서로 사랑하라 /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를 혼자 있게 하라 /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혼자 이듯이.
* ‘테카포 가는 길’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됐습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