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2020

경에게 

 

작은 오두막에서 기억이 자란다 끓는 연탄불에 물솥을 올리고 외출 나갈 작은 오빠 운동화 두 짝을 솥뚜껑 위에 엎어놨다 따뜻해진 발은 이미 청군이 되어 서울역이나 남산까지 한달음에 뛰어 오른다 서랍에는 마른 오징어나 동전 몇 개, 오리온 밀크 캐러멜이었던가 아끼고 모아뒀다 언니 오빠 입에 넣어줬다 그렇게 들었다 그녀의 어린 날 자술서를 1980년, 그녀에게서는 풋풋한 과일 비린내가 났고 난 한 남자를 알아가고 있었다 장미 넝쿨을 두른 빨간 벽돌 이층집에서 살고 싶다고 장승배기 언덕 두 칸 집에서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몸이 느린 나는 밥을 하고 재바른 그녀는 설거지를 하겠지

 

1984년 5월,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녀 말대로 빨간 벽돌 이층집 이었다 김세원의 가정음악실은 크나큰 낙이었다 라디오에서 오픈시그널이 울리면 방청소를 서둘러 끝내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며 곧 이어 나올 시 한 편을 기다렸다 누구 시인지 맞추는 게 그녀와 나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을까 낭송시를 들으며 맥심커피 맛을 알기 시작한 그녀는 고민 많은 재수생이었다 매달 날아오던 시사랑이라는 편지 엽서를 자매같이 나눠 읽던 달달한 시절, 바깥세상은 안개가 자욱하고 모호했다 80년대가 다 기울어갈 무렵, 친정엄마도 없는 봄날, 하얀 면사포를 쓰고 종달새처럼 따스한 품으로 날아갔다 철산 주공아파트였지 아마 길거리에는 곳곳에 최루탄이 터져 연일 매캐하고 동네 슈퍼마켓 진열대에는 물건이 차고 넘쳤다 채소나 계란을 싣고 아파트 입구나 동네 골목을 도는 확성기 소리는 참깨 같은 오수를 번번이 흔들어 놓았다ㅡ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금방 낳은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계란 노른자 같은 땅을 찾아 강남으로 아줌마들이 몰려다닐 때 그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아이 손을 잡고서 꼬박꼬박 늙은 아버지를 찾아왔다 88 올림픽을 막 지나 시드니로 이민 간 큰언니가 영양제나 육포를 가끔씩 보내왔다 언니는 바다 건너 소식을 먹거리로 전해왔다 코리아 엑소더스로 이민 설명회는 연일 미어터졌다 그 힘을 받아 90년대 중반, 나는 허리를 묶고 이민 짐을 굳건히 쌌다 그녀는 팔 하나를 잃은 듯 울었을까 그때 나는 내 팔이 몇 개인지도 모른 채 허둥지둥 서울을 떠난 온 것 같다 이듬해, IMF가 터지고 집집마다 목걸이나 금반지가 사라진다 했다 몇 년 후, 그녀가 놀러왔다 고국에서 찾아온 첫 손님이었음으로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빨래를 널다가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공항 가까운 우리 집 마당 위로 하늘색 날개가 낮게 떠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 마음을 연필로 그려 그녀에게 보냈다 바람에 돌아가는 빨래대나 게라지 세일에서 사 온 물건들, 오 년만 별 탈 없이 흘러가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새 밀레니엄 팡파르가 우렁차게 울렸고 그녀는 한참 자라는 아들과 딸을 양쪽에 끼고 21세기답게 바다를 건너왔다 얇은 고막은 닫고 밤낮 없이 텃밭을 늘였다 여러 개의 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는 방, 기도하는 방, 푸성귀를 쌓아두는 방 그 방이 누구 방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뭐든지 그러모으고 자주 만나 나눴다 왔다 갔다 했던 김치와 부침개 뜨거운 감자탕 냄비 넘어질 때나 아픈 일이 생기면 서로 울었다 왜 아니 없었을까 별별일들이

 

육아낭에서 자라던 새끼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니 빈 방이 늘었다 마음에도 틈이 생겨 바람이 들고 옆이 시려지는 때다 명절에는 더 그렇다‘마른 발꿈치가 갈라지는 꼴을 못 보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 말하는 게 우리 식구들 방식이다 어제 한나절 들썩거렸던 추석, 사진 한 방에 모두를 담았다 바로 옆에 나를 닮은 듯한 얼굴, 이제 내가 그녀를 닮아 갈 때인가 헤어보니 같이 뒹굴며 온 40여 년 몇 번은 토라지고 사랑도 뜨겁게 했겠지

 

작은 오두막은 지금도 기둥처럼 자란다 올해는 라벤더를 심고 상추씨도 뿌렸다

 

 

윤희경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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