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돼야 철이 들까

나는 어렸을 때 동네 애들하고 어울려 딱지 따먹기를 하면서 걸핏하면 억지 부리는 주인집 할머니 손자를 자주 팼다. 그럴 때면 주인집 할머니는 나에게 “종간나새끼!”라고 욕을 해댔다.

내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사과하고 내 손목을 끌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어찌 그리 철딱서니가 없냐”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내 어머니는 ‘방 빼’라고 할까 봐 걱정을 하셨을 거다.

고등학교 때 자기 도시락은 쉬는 시간에 먹어 치우고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 뚜껑에 앞자리 애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거둬 배를 채우는 건달 끼를 부리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밥 수거를 거절하는 애들에게는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녀석의 그 꼬락서니가 역겨웠다. 어느 날 그 짓거리 그만두라고 시비를 걸어 녀석을 두들겨줬다. 하지만 나도 적잖게 얻어맞아 광대뼈가 부어 올랐다.

대학 다닐 때 추운 겨울 날 골목길에서 젊은 여자들에게 끈적대며 접근하는 놈들에게 수작부리지 말라고 끼어들어 싸움이 붙었다. 놈들을 신나게 박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폭력으로 구치소까지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어머니와 형님들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했다.

그때도 내 어머니는 구치소에서 풀려 나와 이 (蝨)가 득실거리는 내 옷을 모두 벗겨 삶으면서 혼잣말처럼 “언제나 철이 들랑가”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회인이 돼 살아가면서도 ‘나와 관계없지만’ 볼썽사나운 일에 참견하는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파출소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내가 소속돼있는 테니스동호회는 중국인들이 주류다. 수시로 낯선 중국인들이 찾아와 (회원들 중 누군가와 친교가 있는 것 같다) 테니스를 친다. 헌데 이들이 공짜로 테니스를 치고 가는 거다. 원칙은 정식으로 회원에 가입돼 있지 않으면 일정금액의 코트 사용료를 내야 한다. 헌데 이 인간들은 슬며시 끼어들어 무료로 즐기다 간다.

매년 오클랜드에 사는 딸네 집을 방문한다는 중국계 싱가포르인 목사도 오클랜드에 머무는 1개월 정도를 동호회에 나와서 공짜로 테니스를 즐기다 간다. 헌데 이번에는 코로나19 때문인지 싱가포르로 돌아가지 않고 3개월 째를 염치도 없이 공짜 테니스를 즐긴다. 하다못해 테니스 볼 값도 안 낸다.

나는 뭐 저런 뻔뻔한 인간들이 있나 싶어 중국인 캡틴에게 항의를 했다. 이게 말이 되냐? 명색이 목사라는 인물이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거냐? 슬그머니 끼어들어 공짜로 즐기다 가는 건 도덕성의 문제다. 그 인간들 모두 캡틴이 원칙대로 정리하라고 요청했다.

당장 그 다음 날 목사는 나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전까지는 얼굴을 마주치며 “하이! 초이”하며 다정하게 인사를 했었다. 나는 그제서야 또 괜히 ‘쓸데없는’ 일에 나섰음을 후회했다. 그러면서 누누이 들었던 내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어찌 그리 철딱서니가 없냐.”

나는 분명 철딱서니 없는 중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와 관계없는 일들에 끼어들어 적지 않은 곤욕을 치렀음에도 이 나이 퍼먹도록 그렇듯 쓸데없는 행동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면 앞뒤 재지 않고 나서다가 미운 털 박히고, 껄끄러운 놈 되고, 마주하기 거북한 인간으로 따돌림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치질 못하니, 이것이 철이 덜든 것인가?

철이 든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생기고 판단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세상을 살면서 보면 철이 너무 들어 나서지 말 것, 말하지 말 것 들을 기가 막히고 절묘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결코 손해 보는 일 없고, 광대뼈 붓는 일 절대 없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편안하다. 이런 인간일수록 음흉하다.

세월을 이만큼 살았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적당히 모르는 척 개 폼을 재고, 부정하고 부패한 수단으로 돈 많이 움켜쥔 인간의 구린 옆구리도 슬슬 긁어주고, 호화스런 요트에 빈대 붙어 소주도 얻어 마시고, 헤헤거리면서 휘청휘청 사는 것이 느긋한 세상살이라는 걸 터득했어야 한다.

헌데 아직도 ‘나와 상관없지만’ 거짓과 속임수를 감추며 변명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출하면서 살아가는 부패한 인간을 보면 분통이 터지고 두들겨주고 싶으니 정말 언제쯤 돼야 철이 들려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아마, 나는 숨이 넘어갈 때쯤 돼야 철이 들려는 모양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 최원규 님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8월부터는 2주에 한번,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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