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색채와 곡선이 어우러진 화면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보헤미안의 이국적인 정서를 듬뿍 머금은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 (Alfons Maria Mucha, 1860~1939 )는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한번 본 사람은 세련된 색채와 곡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면에 속절없이 빠져들어 눈을 떼기 어려울 것이다.

 

01_실용미술을 순수회화와 같은 레벨의 예술성으로 끌어올려

지스 몽다

석판화로 인쇄된 우아하고 격조 높은 무하의 포스터는 광고를 위한 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상업성 대신 드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어 그를 현대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로 불리게 한다.

그는 벽면이나 실내의 장식에 불과했던 실용미술을 순수회화와 같은 레벨의 예술성으로 끌어올려 버려진 칼과도 같은 순수회화의 자부심을 무색케 하고, 순수회화와 실용미술이 예술이란 큰 틀 안에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작품으로 보여준 위대한 화가이다.

찬란한 예술이 꽃피었던 벨 에포크 시절 무하의 작품은 아르누보를 유럽 전역과 미국에까지 퍼지게 했고, 아르누보 스타일은 ‘무하 스타일’이라는 고유명사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02_위대한 화가가 된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밑거름

메데

알폰스 무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던 모라비아의 이반지체에서 태어났는데, 지방법원의 안내원이었던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와 5형제자매 사이에서 자라났다.

그가 위대한 화가가 된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림에 흥미를 가졌던 아기 무하를 위해 그녀는 기어 다니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무하의 목에 연필을 매달아 주며 재능을 살려주었다.

또한 그는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 성향이 짙었고,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가를 불러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의 합창단원으로 활약하면서, 고등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후에 “나에게 성당과 회화 그리고 음악의 개념은 너무나 긴말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성당의 음악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인지 성당이 내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성당의 예술, 건축,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성가대로 브르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화를 그리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쌓아왔던 무하는 1879년 빈으로 떠나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2년 후 회사 작업장에 불이 나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모리비아로 돌아와 장식예술과 초상화를 그리며 지내던 중 쿠헨 백작의 후원으로 뮌헨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게 되었다.

 

03_사라 베르나르와의 만남은 미술인생 가장 큰 전기

사계

1887년 프랑스 파리로 가 쥴리앙 아카데미와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우고 생계를 위해 포스터, 상업 광고, 성냥갑, 포장지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그의 표현기술은 날로 발전해 나아갔다.

무하의 미술인생에서 가장 큰 전기가 된 것은 사라 베르나르와의 만남이다. 1895년 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연말 휴가로 자리를 비운 어느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지스 몽다’의 포스터 주문이 들어오게 되었다.

일할 사람이 모두 떠나버린 상태에서 이 임시직원에게 유명배우의 포스터 제작이라는 행운이 떨어진 것이다. 무하는 자신에게 온 행운을 꼭 틀어쥐고 심혈을 기울여 예술성 높은 포스터를 만들었다.

‘지스 몽다’ (1895) 포스터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긴 사각형의 화면에 실물 크기의 여주인공을 화면 가득 그린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품격 높은 퀄리티로 우아한 여배우의 분위기와 장점을 잘 살려낸 이 포스터는 사라 베르나르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새해 첫날 포스터가 파리 전역에 붙여지자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포스터에 열광하였다. 대중들은 이 포스터를 얻기 위해 붙이는 이에게 뇌물을 주거나 밤중에 몰래 면도칼로 뜯어갈 정도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은 것이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배우이자 모든 남성들의 뮤즈였던 사라 베르나르는 무하의 포스터에서 더욱 아름답고 고아한 여신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하는 그녀의 포스터를 그릴 수 있는 전속계약을 따내었고, 그는 이후 연극 ‘메데’ (1898) 포스터에서 처절한 절망과 광기 어린 눈빛으로 관중을 압도하는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지스 몽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절제된 매력으로 표현된 황비의 모습부터 <메데>에서 보여지는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 찬 여인의 모습까지, 각각 배역의 특징을 잘 살려 사라의 배우로서의 역량과 매력을 아낌없이 표현해 그녀를 천의 얼굴로 만들었다.

 

04_예술을 거리로 끌고 나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즐기도록

황도12궁

알폰스 무하는 1896년부터 1904년까지 100점 이상의 석판 포스터를 제작하며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많은 회화와 광고, 삽화 등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그의 화풍은 ‘무하 스타일’로 불리며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예술로 널리 알려졌다.

아르누보란 NEW ART 즉,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기존의 고전적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어 꽃, 나뭇잎, 빛, 여인을 소재로 곡선과 유려한 색채, 섬세한 기교로 표현한 화풍이다.

선과 면, 색을 강조하고, 대상의 입체성을 배제하고 평면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기법인데, 1880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미국에서 유행한 미술사조이다. 주로 공예와 건축양식에서 보여지고 있으나 알폰스 무하를 기점으로 로트렉, 클림트등 많은 화가들이 이 사조를 거쳐갔거나 영향을 받았다.

무하는 누구를 위한 예술을 할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을 했고, “나는 닫혀있는 응접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예술을 거리로 끌고 나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즐길 권리를 준 것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기술로 인한 사회의 변혁에 발맞춰 대중들도 아름다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여, 대중들의 삶의 질을 높인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05_‘사계…’에서 신비로운 여신의 모습 빌어 4계절의 정취를

사마리아의 여인

비발디가 ‘사계’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사계절의 변화를 표현했다면, 무하는 ‘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1896)에서 신비로운 여신의 모습을 빌어 4계절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4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아르누보의 정수라 할 만큼, 장식적인 요소와 회화적 기법이 잘 어우러진 신선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봄’에서 작품 상단의 꽃과 머리에 화관을 쓰고 리라를 연주하는 여인의 표정은 한없이 사랑스럽다. 조그만 새들과 봄 꽃들로 어우러진 화면은 이제 막 피어나는 새 생명의 경이와 꽃피는 봄의 싱그러움을 담뿍 머금고 있다.

‘여름’에 등장하는 여인은 정열을 상징하는 붉은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어깨를 드러낸 채 기대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농염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왕성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고, 우리는 여름의 오후 불타오르는 열기와 정열을 갈무리 한 채 망중한을 즐기는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추수와 풍요의 계절을 표현한 ‘가을’에서 여인은 가을의 꽃 국화를 머리에 얹고 수확한 포도를 손에 쥐고 있다. 여인의 건강한 팔 근육과 약간 배를 내민 포즈, 입가에 걸린 만족한 미소가 풍성한 가을을 상징한다.

‘겨울’은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흰색 화면과 푸른 로브를 둘러쓰고 움츠린 여인의 모습으로 겨울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추위 속에서도 작은 새들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는 여인의 따스한 마음이 얼어붙은 추위를 녹여주는 것 같다.

이외에도 ‘보석: 토파즈, 루비, 자수정, 에메랄드’ (1900)와 같이 여인과 보석의 마름다움을 매치 시켜 그린 연작이라던가 12개의 별자리를 상징한 ‘황도 12궁’ (1896)과 ‘사마리아의 여인’ (1897) 그리고 ‘꽃’ (1897) 등 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06_‘슬라브 서사시’에서 순수예술에 대한 갈망의 출구를

무하는 연극 포스터, 광고뿐만 아니라 삽화, 식기, 직물의 도안, 의상과 장신구의 디자인, 보석, 레스토랑 메뉴, 인테리어, 장식품, 무대 미술 등 셀 수 없는 실용미술 분야를 섭렵하며 그 재능을 떨쳤다.

뿐만 아니라 실용미술의 백과사전인 <장식 도큐멘트>라는 책을 발간해 후배들에게 그의 모든 이론과 기술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또한 조각가 로댕을 만난 후에는 조각 작품도 만들고, 체코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성 그리스도와 성 메토디우스’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의 통상적인 기법인 조각난 색유리의 조합대신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내었다.

무하는 1906년 결혼하였는데, 아내는 그보다 19살 어린 미술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딜러로 활동하는 등 무하에게는 사랑스런 아내이자 조력자이었다.

아내와 아들, 딸을 키우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작품도 너무나 잘 팔려 부와 명성을 원 없이 누렸지만, 그에게는 못 다한 꿈이 있었다. 순수회화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민족과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은 열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순수예술에 대한 갈망은 ‘슬라브 서사시’에서 마침내 그 출구를 찾아내고 그의 20년 가까운 세월과 예술혼을 갈아 넣어 완성한 이 20점의 연작이 주는 웅대하고도 감동적인 서사시는 우리의 영혼을 흔든다.

 

07_‘모든 슬라브 민족을 위한 서사시’로 체코의 국민화가로

성 그리스도와 성 메토디우스 (스테인드 글라스)

1900년 파리 전시회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의뢰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관의 내부 설계를 작업하던 무하는 좀 더 깊이 있는 설계를 위해 발칸반도를 여기저기 여행하며 20년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된 지역의 슬라브인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에 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뿌리가 된 슬라브 민족의 영혼과 역사를 담은 ‘모든 슬라브 민족을 위한 서사시’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예술혼을 사로잡은 이 위대한 꿈은 그의 내면에서 무르익기를 기다리면서, 꿈을 실현하기 위한 후원자를 물색하며 10여년의 시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1911년 개화하게 되었다.

무하는 1911년부터 1928년까지 2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오로지 이 작품을 붙들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슬라브 민족의 1600년 역사를 관통하는 ‘모든 슬라브 민족을 위한 서사시’는, 가장 큰 작품이 세로 6m, 가로 8m인 대작들 20점으로 구성되어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사회, 문화와 정신을 총망라한 무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웅장하고도 역동적인 화면 속에 민족의 흥망성쇠를 담은 이 작품으로 무하는 체코의 국민화가가 되었고, 무하는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아 이 작품을 프라하에 헌정하였다.

 

08_4세기-6세기 민족의 모습 그린 ‘본향의 슬라브인들’

슬라브 서사시1 본향의 슬라브인들

20개의 작품들은 시대 별로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그 시대의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본향의 슬라브인들’ (1912)은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의 민족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발트해와 흑해사이 비스툴라강과 드네르프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이 민족은 그들을 집결시킬 단단한 정치구조가 없이 부족사회의 형태로 살고 있었다. 서유럽 지역을 지배하던 게르만 민족의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로 고통받는 슬라브 민족의 모습이 작품 속에 담겨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음울한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상단에는 칼과 창으로 그들을 유린하는 게르만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저 멀리에는 그들의 보금자리가 불타고 있는 듯 붉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작품 하단에 그려진 숲 속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흡뜨고, 공포에 질려 앞을 바라보는 부부의 모습에서 힘들고 고단한 그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암울한 배경 속에 빛을 발하는 별들이 희망을 나타내고, 마치 구원의 상징인양 공중에 떠서 팔을 벌리고 신에게 간구하는 사제의 모습이 보인다. 사제의 오른 편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붉은 옷의 전사가 그의 팔을 부축하고, 왼편에선 평화를 상징하는 흰 옷의 여인이 사제의 왼팔을 부축하고 있다. 이 시기 슬라브 민족의 고통과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구원을 향한 열망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다.

 

09_‘슬라브 서사시’ 대미 장식하는 ‘슬라브인의 휴매니티’

슬라브 서사시20 슬라브인의 휴머니티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마지막 작품은 ‘슬라브인의 휴매니티’이다. 이 작품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작품으로 슬라브 민족의 역사 전체를 4개의 색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작품 하단의 고대 본향인들은 푸른색으로 묘사되었고, 중간 부분 좌우의 검은색은 프랑크족과 투르크족의 공격, 빌라호라 전투에 패배한 후의 300년간에 걸친 암흑시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작품 상단의 붉은색으로 보헤미아 왕국과 카렐 4세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면을 그렸다. 가운데 부분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기쁨과 자유를 나타낸다.

슬라브 민족의 상징인 보리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감격에 벅차 귀환하는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승리의 화환을 엮고 있는 여인들, 독립을 기념하는 커다란 깃발이 가로지르고 하늘을 향해 환호하는 이 등 모두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다.

작품 상단에 커다랗게 그려진 슬라브 청년이 승리와 화합의 화환을 손에 들고 양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에서 살아남아 빛나는 미래를 향한 도약을 약속하는 젊음의 열정이 보인다.

1600년의 역사가 한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이 모든 장면 뒤 무지개와 함께 두 손을 펴서 축복을 내리는 예수의 모습이 은은하게 보인다. 그가 그린 모든 작품을 총망라해 놓은 듯한 이 작품은 ‘슬라브 서사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뛰어난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10_“내 작품의 목적은 인류 모두의 가교 놓는 것”

알폰스 무하 자화상

1939년 알폰스 무하는 조국을 침공한 독일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많은 고초를 겪고 결국 폐렴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나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0만이 넘는 추모객이 몰렸다. 그는 갔으나 그의 위대한 작품은 남아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희망과 위안을 준다.

그는 말한다. “내 작품의 목적은 가교를 놓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가까워지고 이로써 쉽사리 서로를 점점 잘 알아가게 된다는 희망이 우리 모두를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나의 미약한 힘으로 이루어진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우리 슬라브 민족에게 이렇게 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자신과 조국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그가 사랑하는 조국 체코의 프라하를 사랑하는 또 다른 예술가 사이페르트의 시 ‘프라하의 노래’를 바친다.

 

프라하에 서서 내다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거친 숨을 몰아 쉰다.

나 그를 사랑하기에.

 

내 마음 신을 향하기에

그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은하수 저 너머까지

저 장막을 넘어서까지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그의 훌륭한 조화를 찬미하기 위해

나 그 안에 살리라.

 

이 도시에 손을 대는 자들이여

그 누구라도

그리고 아무리 달콤한 피리소리로

다정한 척 하더라도

산 채로 껍질을 벗기 우리라

 

* 다음 호에서는 원초적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신비로운 루소의 세계로 가보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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