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탈출 (歸鄕)

인적 없는 아침 동네 길, 넓은 공원, 맑고 시원한 공기, 깊은 호흡과 함께 홀로 걷고 있었다. 갓 부화한 새끼 일곱 마리를 거느린 오리 가족이 한가롭게 풀숲을 뒤지며 거닐고 있었다.

너무 귀엽고 예뻐서 가까이 다가가자 ‘괙! 괙!’ 가장인 아빠 오리가 입을 크게 벌리며 위협적으로 내 앞으로 달려왔다. 나는 짐짓 깜짝 놀라며 다리야 나 살려라 도망치며 그들을 우회했다. 아빠 오리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멀리 도망가는 나를 향해 길게 뺀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여러 가지 얽매임에 갇혀서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마 그럴 것이고 각자가 지양하는 희망과 욕심의 크기에 따라 스트레스가 함께했을 것이다. 문제는 스트레스 누적을 방치하면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넘어 삶이 피폐한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스트레스와 불편함을 게으름과 부지런함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럼에도 해결이 안 되었을 땐 그 근원을 과감하게 몽땅 도려내버렸고 이로 인한 심신과 경제적 손실은 흔쾌하게 감수해왔다. 이러한 삶의 형식에는 복합적 삶이 아닌 단순화된 삶을 기반으로 해야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은퇴 후부터 매일 새벽 1시간 산책을 하며 뉴스를 듣고 있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숨가쁘게 돌아가는 호주 이민생활을 하고 있지만 고국 소식에 익숙해야 언제든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고 죽을 땐 어색한 세상의 이방인으로 마무리하긴 싫기 때문이었다.

상업성 없는 라디오방송을 공정한 뉴스라 신뢰했고 청취율 상승을 보면서 내 판단에 안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앵커의 인기 상승과 함께 인터뷰 질문과 답변에서 앵커의 오만함이 느껴졌다. 그 느낌은 반복적으로 지속됐고 어느 날 한 순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겠다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말을 바꿔가며 집요하게 질문을 반복했고 답변자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앵커는 결국 최종질문을 했다. ‘답변을 할 수 없다면 A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 결국 A 아닌가요?’ 질문자 스스로 답변을 만들어 동의를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편향된 언론권력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공인으로서 청취자나 국민을 위한 정확하고 객관적 정보제공과 의무적 봉사자일 뿐이다. 인기와 신념에 빠진 권력자로 변질되면 대국민 배신자일 뿐이다.

극도의 짜증이 유발됐고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짜증은 편향되지 않은 공정뉴스를 듣고 싶은 얽매임에 갇힌 스트레스의 증거였다. 더구나 그 공정의 기준은 내 느낌이고 판단 아닌가. 일베나 개딸 또한 자신들의 정의에 부합하는 가짜뉴스를 선호하는 것 아닌가. 이들을 통해 제공되는 상반된 정보의 홍수 속에 지쳐버릴 수밖에 없는 이 암울한 세상에서 원하는 공정뉴스만 듣겠다는 건 탐욕일 수 있었다.

대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소중한 새벽시간을 짜증으로 낭비할 수 없다. 황혼의 삶 그 본능을 믿고 그냥 걸을 뿐 어떤 방송도 듣지 않기로 했다. 한 순간에 라디오를 끄고 아무 준비도 생각도 없이 걸었다.

뭔가 생소하고 어색한 느낌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잡음에서 이탈된 이 느낌은 마음을 평온케 했고 머리는 한결 가벼웠다. 무엇보다 뉴스 듣기에 집중할 필요도 질문과 답변에 대한 생각의 정리도 없어졌다.

그저 땅바닥 보며 걷다가 앞을 보기도 하고 옆을 보기도 하며 남의 집 정원을 무심히 보며 평온하게 걸었다. 하루의 시작, 이 소중한 새벽을 ‘텅’ 비우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가끔 온갖 망상 (妄想)이 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또한 즐기면 그만이었다.

텅 빈 새벽의 시작이란 새로운 일상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었다. 목적 없는 한가로운 시간, 울창한 숲, 단풍, 잔디, 풀꽃, 꽃잎… 자연의 친구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오고 신호와 느낌을 보내고 있었다.

어떨 땐 마음과 생각과 태도와 모습이, 내 글의 주제와 내용이, 음미하는 느낌이, 새로운 표현들이, 마구 찾아오고 있었다. 엄청난 것들이었다. 오염 여부도 확인될 수 없는 세상의 뉴스에 얽매어 화내고 짜증내고 흥분하고 분노에 묻혀 있었던 불쌍하고 초라한 모습들을 내던져버린 대가였다. 새로운 시작 (歸鄕)이었다.

 

 

글 / 정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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