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그렇게 세월은 돌고 돌지만, 그래도 언제나 똑같지 않은 것은 시간의 흐름입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하지만, 역사도 반복되기는 하지만, 희극과 비극의 차이는 있다지요. 여기에 희망의 여지가, 변화의 틈새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여, 누가 뭐래도 역사는 움직이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ㅡ 미국 뉴저지주립대학교 럿거스대학대학원 정치학 박사이며 전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교수인 박의경 교수가 나에게 던져준 화두다.
대한민국 문단에서는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원로들의 문학정신을 이어가고자 지역단체 또는 출판사에서 각종 문학상을 제정했다. 김동리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내가 알기로 그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대형출판사인 ‘문학사상사’에서도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을 기리며 그의 작가 정신을 계승하고 한국소설계의 발전을 위한다면서 1977년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이상(1910~1937)은 스물일곱의 푸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내가 학창시절에 접한 그의 시 ‘오감도’는 난해했다. 나의 수준 낮은 지적 깊이와 폭으로는 그의 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불가능했다. 다 늙은 지금도 역시 그렇다. ‘현대인의 도착되고 분열된 내면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강박적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그의 단편소설 ‘날개’를 읽고 나서는 한동안을 정신적인 혼란과 방황을 겪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인정받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은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다. 이 작품집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끈다. 수상작품 상금은 대상 1,000만원 우수작 각 100만원이다.
수상자로 선정되면 명예와 함께 문단에서의 위치가 굳혀진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불어 책 판매도 늘어나 그에 따른 수입도 늘어난다. 가난하지만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눈 바르게 보이고, 귀 제대로 들리고, 입 똑바로 열려있는 글쟁이들에겐 뿌듯한 자긍심이다.
소설가 김금희는 이상문학상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그러나 시상기관인 문학사상사에서 보내온 계약서를 받아보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짐에 분노했다. 계약서 내용은 ‘수상작품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며, 3년안에 다른 작품집에 수록할 수 없으며, 표제작으로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금희는 문학사상사에 문제제기를 했다. 내 작품을 내가 사용하는데 왜 내가 당신들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가? 오히려 당신들이 저작권자인 나에게 사용허가를 얻어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것 아니냐고 깨우쳐줬다. 문학사상사는 대답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관성이고, 관행이고, 관습이고, 습관이고, 전례이고, 출판계의 흐름이라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메마른 목소리였다.
김금희는 수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대형출판사에서 자신에게 가해질 불이익과 불편함을 각오하고 공론화에 나섰다. 그가 말했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운영될 것이기에.”
그러자 함께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최은영, 이기호도 수상을 거부했다. 김금희는 1979년생 마흔 한살이다. 이기호는 1972년생 마흔 여덟 살, 최은영은 1984년생 서른 여섯 살이다. 불의를 외면하며 하늘을 등지고 엎드려만 있었던 부끄러운 나의 세월들이다.
혹시 그대들은 문단의 작은 해프닝이라고 여기는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개체발생 (個體發生)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계통발생 (系統發生)을 인지하지 못하는 슬픈 청맹과니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저 먹고, 마시고, 숨쉬기에만 급급한 무뇌충일 수도 있다. 한 글쟁이의 수상 거부는 박의경 교수의 주장처럼 ‘희망의 여지가, 변화의 틈새가 보이는’ 계통발생이다.
시인 이육사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했다는데, 자기희생적 의지가 담긴 가난한 노래의 씨는 기다림 속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푸르고 푸른 세상을 위해 스며들고 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