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린다.
‘괜찮아, 세월 따라 떠나가면 우리 잘못이 없어…’
청심환을 먹고 대중 앞에 선 아마추어 중년가수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눈을 뜨고서도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균형이 맞지 않은 긴 머리에 잔뜩 힘을 준 머리카락들 사이로 세월의 자욱이 드러난 얼굴이 노래의 메시지를 더 진하게 던져주었다.
먼 곳에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비몽사몽 떠오르면서 들썩이는 어깨와 눈물은 멈추지가 않았다.
요즘 비가 멈추지 않고 밤낮으로 계속 내리니 마음까지 우울하다.
뉴스에서는 매일 비 피해 소식들로 가득하다.
이맘때쯤이면 매년 내리는 비 치고는 그 강도와 양이 예년과는 달랐다.
60여 년 만에 내린 큰 비로 여기저기 길도 다리도 막혔다.
시드니로 갈 때 이용하는 벨 고속도로 (Bell Highway)는 비로 침식되어 막혀서 언제 복구가 될지 모른다고 한다.
집에서 학교까지 출근하는 도로에 있는 다리도 물에 잠겨버렸다.
출퇴근길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지만 다른 지역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
가뭄, 화재, 코로나19, 홍수로 호주 대륙은 고난의 강타를 연속 맞고 있고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나마 잘 견뎌 내고 있으리라.
역경 속에서 감사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생이 내게 가르쳐준 귀한 메시지다.
엄마는 10대 때 겪은 끔찍한 경험을 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 꺼내곤 했다.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태풍 중 하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는 ‘사라호’ 태풍 때의 일이다.
슬레트 지붕이 들썩들썩 하며, 마치 지붕이 한 순간에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위기가 닥치자 비바람 몰아치는 강풍 속을 뚫고 소녀였던 엄마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아래서 올려주는 커다란 돌을 받아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올려놓고 내려왔다는 용기.
다섯 형제자매 중에 셋째였지만 가장 씩씩했다던 엄마의 무용담이 빗속에서 빛을 발한다.
아버지의 위기도 폭우와 함께 시작되었다.
형님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전 재산을 털어 연고도 없던 낯선 도시에다 새집을 짓는 무모한 결정을 내렸던 시절.
결론이 보일 것 같지 않는 이웃과의 마찰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 즈음.
집은 점차 순조롭게 지어지고 있나 싶었는데 예고도 없이 자연재해가 찾아왔다.
폭우가 쏟아져 새 터전 위로 흙무더기가 끝도 없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거친 물살에 쓸려 내려가는 축대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던 가장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래저래 새 집 마련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 어깨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거칠고 험한 시간들을 보내며 지내온 많은 이야기들이 두 분 얼굴 주름 사이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념무상이 된다.
어릴 적 유리창 밖으로 보았던 골목길 위로 쏟아졌던 빗방울들…
그 영롱한 순간만큼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세월의 강물에 떠 밀려와 어린 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시공간에 닿아 와 있다.
오늘도 나는 강물 위로 우수수 내리는 빗방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현실이 주는 고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느껴보고 싶다.
빗방울은 용수철처럼 튕기며 강물 위를 천진스런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닌다.
잠시 태어난 햇볕에 감싸 안기면 그것들은 눈이 부시게 빛나기도 한다.
그 빛은 소유할 수도 없고 영원할 수도 없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사라져 가는 그 형태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도 결국 눈부시게 아름답고 또 슬픈 이별을 품고 있다.
영원할 것 같은 이 시간들, 영원할 것 같은 장마, 무서운 폭우…
그것들이 결국은 끝을 보일 것임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조바심 친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는 만났고 또 언젠가는 모두 떠나게 되겠지.
글 / 송정아 (글벗세움 회원·Bathurst High 수학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