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멍?!

우리가 어렸을 때는 TV를 가리켜 ‘바보상자’라 했습니다. 나름 일리 있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TV는 시간도둑’이라는 생각을 진하게 갖고 있습니다. 한번 넋 놓고 TV에 빠져들다 보면 몇 시간을 도둑 맞는 건 그야말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호주에 처음 왔을 때는 10불을 내면 비디오테이프 여섯 갠가를 빌려주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방송된 한국의 인기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또는 시사프로그램 등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는 당시로서는 우리가 한국 TV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빌리는 금액이 만만치 않다 보니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 돌려가며 보는 알뜰함도 한몫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말 그대로 용이 됐습니다. 한국과 같은 시간대에 원하는 방송,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계속되는 록다운 조치로 집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TV와 함께 하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집 안팎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하게 되지만 TV와 친구를 하는, TV에 시간을 도둑 맞는 시간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욕하면서 보는 한국 드라마…. 결국은 뻔한 스토리 전개에 정해진 결말인 데도 작가의 의도대로 그 과정에 몰입하면서 드라마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악녀 혹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흥분하고 욕을 하게 되는 걸 보면 TV는 정말 바보상자 아니, 바보를 만드는 상자인 듯도 싶습니다.

남자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고 심지어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드라마를 즐겨 보는 아줌마스러움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드라마가 끝나면 채널을 돌려 다음 드라마를 보고 또 다른 예능프로에 빠져들고… 그러다 보면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지나버리곤 합니다.

다행이 아내와 저는 코드(?)가 잘 맞아 TV 채널싸움 같은 건 벌이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 마지막 회가 방송된 KBS 2TV ‘오케이 광자매’의 바보스러울 만큼 헌신적인 아버지 이철수 (윤주상 분)의 안쓰러운 삶에 몰입하면서 함께 “이건 아니라고 봐!”를 외치던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장안의 인기를 끌며 시즌3까지 이어왔던 SBS TV ‘펜트하우스’는 지나치리만치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 진행과 도를 넘어서는 잔인함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욕을 하며 몰입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알콩달콩 그려가는 KBS 1TV ‘속아도 꿈결’은 모처럼 욕하지 않고 볼 수 있는 훈훈한 드라마입니다. 최근에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사랑을 여과 없이 그려내는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가 저의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흥미롭게 보는 예능프로그램 중 채널A ‘애로부부’가 있습니다. 옛날 KBS 2TV에서 방송했던 ‘사랑과 전쟁’의 요즘 버전 정도로 여겨지는 이 프로그램은 이런저런 문제를 지닌 부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실화에 근거해 보여주는데 욕하며 보는 프로그램의 끝판왕쯤 됩니다. 뒷부분 속터뷰 (속 터지는 침실 이야기)는 가끔 “어? TV에서 저 정도로 찐한 이야기까지?’ 싶은 야한 이야기도 용감하게(?) 담아냅니다.

토요일 밤 10여명의 패널들이 등장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수다 혹은 설전을 벌이는 MBN ‘동치미’도 많은 공감이 가는 프로그램입니다. 부부간, 가족간, 특히 고부간, 장서간 갈등을 비롯해 우리의 삶과 많이 닮은 이야기들이 매주 등장하고 있어 매 순간 흥미가 진진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TV멍을 때리며 시간을 도둑맞다 보면 문득문득 지난날들이 떠오르면서 “그때 아내에게, 가족에게 좀더 잘할 걸…”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저 자신을 향해 “그래도 임마, 지금이라도 정신을 조금 차려서 얼마나 다행이냐?” 하며 혼자 웃곤 합니다.

 

**********************************************************************

 

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Previous article엄마도 영어 공부 할 거야! 194강 나도 좋아해
Next article미셸 유의 미술칼럼 (38) 현대 벽화예술의 아버지 디에고 리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