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와 영주권

왼쪽 무릎에 있는 흉터는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더 선명해진다.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 어느 정도 옅어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십오 년을 훌쩍 지난 지금도 이 흉터만은 작아지거나 희미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꿰맸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아니 애당초 상처를 치료해줬던 의사도 나에게 얼마 정도 봉합했는지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꿰맨 부분이 감염되어 부종과 피고름으로 얼마 동안 병원 출입을 하며 드레싱을 교체했고 상처가 아물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만 또렷이 기억한다.

검지 손가락 반 마디 크기의 흉터는 앉아 있으면 송충이가 됐다가 일어서는 순간 바짝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로 변한다. 아마도 한국에 있었더라면 흉터가 심하게 남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의사의 정교한 치료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송충이가 됐건 무말랭이가 됐건 그때는 타국에서, 그것도 병원비를 내지 않고 무료로 치료를 받았던 것에 감사해야 했다.

하루를 시작하다 보면 이상하게 깨느른한 날이 있다. 삼 개월간 준비한 영주권 신청서류들을 순서대로 챙겨 흐트러지지 않게 큰 봉투에 넣자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두툼한 서류를 바인딩해 이민성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 처리해야 할 일도 없었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하루쯤 소파나 침대에서 널브러져 있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래도 이왕 끝냈으니 서류를 보내는 일까지 마무리하자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바빠졌다. 우체국은 늘 긴 줄로 분주했기에 남들보다 먼저 문을 열기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아름드리 고무나무가 늘어진 공원을 지나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찌그러진 자동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 쪽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휘파람을 휙 불면서 내리더니 인사를 했다. 동양 여자만 지나가면 캣콜링을 해대는 예의 없는 남자겠거니 무시하고 지나려던 순간 남자가 내 가방을 낚아채 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방을 고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잽싸게 두 팔을 뻗어 닫히려는 차 문을 꽉 잡았다. 나를 매단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수석의 남자는 죽고 싶지 않으면 팔을 떼라고 소리를 질렀다. Please help me, help me. 내 가방을 낚아채가는 놈들에게 help me 라니, 내 울부짖음에 도와줄 놈들이라면 애당초 지나가는 여자의 가방을 채가지도 않았겠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을 향한 애걸복걸뿐이었다.

차가 잠시 정차했고 조수석에 있던 남자가 내 팔을 차 문에서 떼내더니 길바닥으로 나를 내동댕이쳤다. 돌아서는 남자의 다리를 다시 붙잡았다. 남자는 욕설을 퍼부어대며 내 머리를 걷어차고는 차에 올랐다. 차는 타이어 타는 냄새를 풍기며 사라져갔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멀어져 가는 차의 번호판을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번호판만 알고 있으면 날치기해간 범인을 잡기 수월할 테니 혹여 놀라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보았던 번호판을 까먹지나 않을까 구구단 외우듯 수십 번을 되풀이했다.

차에 매달린 채 얼마를 끌려가는 사이 신고 있던 샌들은 도로에 버려진 듯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보니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가시덤불을 막 헤집다 나온 것처럼 얼굴과 팔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들도 역력했다.

몸은 떨렸지만 통증은 느낄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가방에 들어 있던 영주권 서류에 대한 생각만 났다.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요건이 될 때까지, 구비서류들을 준비하기까지, 또한 그 서류들에 기재하거나 부수 증빙서류들을 위해 노력한 지난 5년간의 고생이 가방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물거품이 된 듯했다.

누군가의 신고로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나를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응급실 앞에서 내가 들어가기를 꺼리자 경찰이 내 속을 단박에 알아채고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 걸음을 재촉했다. 달리는 차에 매달려 오십미터만 더 갔어도 아마 생명에 위태했을 거라는 경찰의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려야만 했다.

찢어진 부위를 봉합하고 여기저기 긁힌 생채기에 소독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검사를 해봐야 한다면서 CT Scan을 기다리고 있을 때 경찰은 간단하게 ‘Police Report’를 작성해야 하니 자초지종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달리던 차에 매달려 애써 지키려 했던 것이 영주권 신청을 위한 구비서류였다는 말을 듣더니 경찰은 허무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원본을 복사해서 다시 준비하면 될 텐데, 명품 가방도 아니고, 더더욱 큰 금액의 현금이나 귀중품이 아니라 단지 영주권 서류라니, 경찰은 ‘Just’에 강세를 두더니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지난 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네댓 시간도 안 되게 잠을 잤을 뿐 아니라 실컷 늦잠을 자본 적도 없었다. 주말에는 카페에서 여유롭게 브런치를 먹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울 정도였다. 비스킷으로 하루를 버틴 날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힘든 시간과 노력이 그 서류에 담겨 있다.’

경찰에게 내가 왜 그 서류에 그렇게까지 집착했는지 설명해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십분 이해할 수 있게 요약해서 전달해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 달 이내에 체류 기간이 말소된다, 그 서류를 빨리 접수해야만 Bridging Visa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대신했다.

내 말을 열심히 받아 적던 경찰이 나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야 하지 않겠지만 만약에라도 또 같은 일을 겪게 될 경우엔 주저하지 말고 ‘Let it go’ 그리고 ‘Nothing is more important than your life’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날은 나에게도 재수 옴 붙은 날이었지만 도난차량을 가지고 횡재라도 만난 듯 동양여자의 가방을 낚아채간 그들에게도 그다지 운 좋은 날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한 유학생의 가방은 명품과는 거리가 먼 싸구려 비닐가방이었고 지갑 안에는 이틀을 더 탈 수 있는 기차표, 샌드위치 하나 간신히 살 수 있는 정도의 현금만 있었으니까.

다행히 잃어버린 가방은 그날 밤 어느 노부부의 백 야드에서 발견이 되었고 서류는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도난 당했던 서류를 찾아 이민성으로 보내고 보름 만에 영주권이 승인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 무릎의 상처에서 오는 통증도 가벼워지는 듯했다.

어떤 동기나 사연을 가지고 모국을 떠나 타국에 정착한 이들의 삶은 통과의례처럼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게 마련이다. 결찌 하나 없는 호주에 혈혈단신으로 처음 올 때만 해도 바이킹을 타는 듯하게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 많을 거란 염려는 하지 않았었다.

내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하고 매일 말하기, 듣기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소통이 될 때까지 수고스러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쪼들림은 이미 각오했기 때문에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란 신념도 있었다. 사람 사는 일이 뭐 어디든 다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느슨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타국 생활은 끊임없는 난항과 이변의 연속이었다. 이제 몇 해를 더 넘기면 모국에서 산 시간보다 호주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다. 어떤 시련이었든 간에 배겨내기를 반복한 뒤에는 강한 회복탄력성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예견치 않은 큰일이 벌어져도 블랙코미디 같은 영화 한 편을 본 듯 시니컬 해지기도 한다.

내 몸의 일부로 자리 잡은 흉터처럼 타국에서의 삶 또한 내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됐을 때, 그 동안 가슴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조급함이나 기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글 / 이주실 (글벗세움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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