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있는 날

아내도 저도 둘 다 풋풋했던20대 시절… 우리는 데이트를 위해 명동을 즐겨 찾았습니다. 늦깎이 가난한 대학생을 남자친구로 둔 아내는 길거리 리어카에서의 홍합탕이나 어묵꼬치, 뒷골목에서 먹던 라면에서 늘 행복과 만족을 느끼곤 했습니다. “우리,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50원 더 내고 떡라면 먹을까?” 하는 제 너스레에 아내는 항상 박수로 화답을 해줬습니다.

40년도 훨씬 전인 그 시절, 명동 뒷골목에는 ‘핑계 있는 날’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하나 있었고 그 바로 맞은 편에는 ‘오늘이 그날’이라는 카페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도 오늘 핑계 한번 만들어볼까?” 하면 아내는 까르르 웃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같은 가난한 젊은 연인들에게 명동은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핑계’를 좋아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죽(?)이 잘 맞아서 무슨 무슨 핑계를 만들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걸 즐겨 하는 겁니다. 지난 주말에도 이번에는 제 생일을 핑계로 아내와 단둘이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빡센 일정을 갖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반쯤 떨어진 윈당 (Windang)에 아주 작고 귀여운 집을 하나 얻어 오롯이 우리 둘만의 시간을 즐겼습니다. 일라와라 호수 (Lake Illawarra)를 바로 눈 앞으로 품고 있는 그 집 (Cudgeree Bay Tiny Stay)에서의 생활은 마치 소꿉장난을 연상케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 전혀 없어 우리는 여행기간 내내 편안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에 달하는 흑고니 (Black Swan)들이 우리 집 바로 앞에서 여유롭게 노니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고 녀석들 등 뒤로 연출되는 붉은 색 노을은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마음 착한 아내는 여행기간 내내 찌질한 남편을 위해 다양한 음식들을 식탁에 올렸습니다. 넓디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두 번의 바비큐 기회를 가졌는데 한번은 늘 먹던 삼겹살에서 과감히 업그레이드(?), 입에서 사르르 녹는 와규꽃살을 즐겼습니다. ‘평상시에는 라면, 특별한 날에는 떡라면’의 그 시절 기분을 42년만에 다시 연출했던 겁니다.

개중에는 우리를 향해 ‘돈이 많아 여행을 자주 다닌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여행은 아내 덕분에 매우 검소하고 언제나 가성비가 높습니다. 여행기간 동안 먹는 음식은 거의 대부분 집에서 먹던 음식들을 그대로 가져가기 때문에 별도의 추가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외식은 아예 생각지도 않습니다. 집을 떠나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숙소비용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 자동차 기름값이 더해지는 정도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집에서 먹던 음식을 장소만 달리해 똑같이 먹었을 뿐 다른 지출은 일절 없었습니다. 3박 4일 동안의 숙소비용 774불에 기름값 60불 정도가 불가피한 지출의 전부였습니다.

마음 착한 아내는 스스로가 앞장 서서 알뜰한 여행을 이끌고 저에게는 설거지조차도 안 시키려 합니다. 다 거기서 거기일 것 같고 그 바다가 그 바다일 것 같은데도 아내는 가는 곳마다 예외 없이 감탄과 행복을 쏟아냅니다. 드넓은 바다 혹은 호수에서 낚싯대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도 우리는 더 없는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곤 합니다.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사이즈의 물고기들이 잡혀서 녀석들을 다시 던져주고 빈 통으로 돌아오면서도 우리는 늘 즐겁습니다.

돌아오는 길, 그냥 오기 섭섭해서(?) 구글맵만 보고 로얄내셔널파크 내 위니프레드 폭포 (Winifred Falls)를 무작정 찾았는데 편도 1킬로미터의 험난한 길을 걸어 겨우 당도한 곳에는 바짝 마른, 개울 수준의 빈약한 폭포가 전부였습니다. “어떤 놈이 이걸 폭포라고 한 거야?”라며 투덜대는 저에게 “그래도 여기 온 덕분에 우리 이번 주 산행 못한 거 했잖아” 하는 아내입니다.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하여튼 초 긍정 전도사(?)인 아내는 저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여행짝꿍입니다. 앞으로도 기회만 되면 ‘핑계 있는 날, 오늘이 그날’을 많이 만들어서 라면, 가끔은 떡라면을 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는 다짐을 새삼스레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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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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