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 형제 등과 같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 ‘피붙이’에 대한 우리말 사전의 설명입니다. 어릴 때부터 형제자매가 없었던 저는 늘 외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도 잘잘못을 떠나 형제자매 여럿이 떼거지로 덤벼드는 바람에 저는 번번이 ‘깨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거의 밖으로 돌았고 어머니 또한 생계를 위해 외부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저는 항상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제 위로 형이 넷,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는데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랬듯이 한국전쟁 후 제 형제들도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이런저런 질병으로 모두 하늘나라로 갔고 저만 용케 살아남았던 겁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형제자매가 득실대는 집들이 몹시 부러웠던 저는 훗날 꼭 형제자매가 많은 집으로 장가를 가야겠다는 꿈(?)을 키워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모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불행히 저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처갓집이라고 찾아가도 늘 냉랭한 분위기는 물론, 장모라는 사람이 아예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어떻게든 다가가고 친해지려 애를 써봤지만 끝내 가능성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이 어린 처남 둘과 처제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마찬가지였고 나름 지친 저도 “에잇, 관두자!” 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인어른과 할머니까지 인연을 끊고 산 건 아니었고 다섯 고모들과는 꾸준히 만남을 가지며 지냈습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장인어른 직장으로라도 종종 찾아가 뵐 걸…’ 그리고 ‘혼자 지내시는, 아내에게는 엄마나 다름 없었던 할머니라도 자주 찾아 뵐 걸…’ 하는 아쉬움과 죄송스러움은 지금도 깊게 남아 있습니다. 더군다나 두 분 모두 우리의 결혼 몇 년 후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나셨기 때문에 죄스러움이 더 큽니다. 제 아버지 또한 제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쉰넷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못다한 정을 장인어른과 많이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제 생각이 짧고 어렸던 탓에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이제는 제가 그 아버지 그리고 장인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 옛날, 제 아버지와 장인과 못다했던 것들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은 어린(?) 그들이 저처럼 훗날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갖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라도 제가 좀더 적극성을 띠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말입니다.
형부… 제가 가장 듣고 싶은 호칭입니다. 몇 년 전 우리 모임에서 활달한 성격의 한 자매가 제 아내를 언니라 부르면서 저에게 ‘형부’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선사해줬습니다. 코드가 잘 맞는 우리는 함께 음식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얼싸 안으며 정말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우연찮게 그의 친형부가 모임에 합류하면서 저에 대한 호칭은 유감스럽게도 ‘오라버니’로 강등(?)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촌처제 둘이 왔을 때 그들과 3박 4일을 함께 지내며 저는 ‘형부’ 소리를 참 많이 들었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한국에 갔을 때 가끔 만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긴 했지만 함께 잠을 자며 동선을 같이 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신기했던 건 훈이와 봄이였습니다. 할머니 같지 않은 두 이모할머니를 처음 만난 두 녀석은 처음에는 조금 쭈뼛쭈뼛하더니 이내 강한 친밀함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훈이 녀석은 춤도 추고 괴성(?)도 지르며 두 이모할머니한테 덥석덥석 안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의 까칠공주 봄이도 빠른 속도로 이모할머니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모르긴 해도 하루 이틀만 더 함께 지냈어도 녀석들은 그들과 엄청 친해졌을 겁니다. 두 처제들도 훈이와 봄이가 너무너무 예뻐서 그야말로 물고 빨고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아무리 한 다리 아니, 몇 다리 건너라 쳐도 피붙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게 얼싸 안고 한동안 서로를 토닥거렸고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짧은 만남에 긴 아쉬움이 남았던 탓이었을 겁니다. 한국에서든 호주에서든 이제부터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빼놓지 말고 얼굴을 마주하며 피붙이의 정을 나눠야겠다는 다짐을 가져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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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생. 한국 여성지 <여원> <신부> <직장인> <젊은엄마> 기자 및 편집부장, 호주 시드니 <코리아타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함.


김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