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너랑 마주앉아 흘러간 옛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낄낄대면서 주위 눈치보지 않고 밥 먹은 것이 얼마 만이냐? 나는 말이다, 음식 먹는 소리도 내지 않고 여유 있는 표정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곤거리듯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식사 예절을 중시하는 자리는 피곤하다.

나는 그런 가식적인 자리는 답답하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소화도 안 된다. 그런 자리는 대화의 소재도 지적이고, 사용하는 말투도 품위 있고, 표정도 기품이 넘쳐나야 하는 거다.

헌데 난 지식인을 흉내 내 고상한 척할 마음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오줌도 자주 마렵고 해서 불편하다. 아무튼 너랑 허름한 국숫집에서 떠들면서 밥 먹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오랜 친구가 편하다고 하는가 보다.

친구야,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이민 초창기, 그러니까 한 25년쯤 됐지? 내가 라디오방송 한다고 껍죽대기 시작했을 때니까, 그 정도 됐을 거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때가 돼지갈비 전문으로 하는 교민 음식점에서였다.

너는 그때 니 가족들하고 외식을 했었지. 너희 부부는 나이든 어머니를 가운데 자리에 앉히고 극진히 모시더라. 고기를 구워 가위로 쓱쓱 썰어 니 어머니 앞 접시에 놓아드리면서 드시라고 권하는 모습에 내가 감동 먹었지. 그 모습에 나는 세상 떠난 내 어머니가 생각나 혼자 훌쩍거렸다. 요즘엔, 특히 교민사회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너는 속된말로 잘 나갔다, 연립주택인지 뭔지를 몇 채 지어서 당당한 건설업자로 어깨에 힘도 주곤 했었지. 근데 미안한 말이지만 넌 계산을 잘못한 거야.

당시 한국에서 하늘 건너온 사람들 대다수가 위층에서는 대소변 보고 아래층에서는 밥 먹는 아파트에서 다닥다닥 붙어살다가, 이름 모를 온갖 꽃들과 초록빛 풀들이 사시사철 푸르른 이곳의 정원을 보곤 연립주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거야. 그러니 니가 지은 연립주택이 인기가 없었던 거지.

어쨌거나, 그 빌어먹을 건축사업이 재미를 못 보자 이번에는 식당을 차려 요식업에 투자했었지. 니가 벌린 그 식당은 상쾌하다 할 정도로 깨끗했었지. 사용하는 용기나 고기의 질도 고급스러웠었다. 역시 넌 비즈니스 마인드가 남달랐었다.

헌데 그게 또 아니었지. 교민 수가 늘어나질 않으니 한국음식점이 잘되면 얼마나 잘되겠냐? 고깃집 접고 횟집도 했었지? 그것도 나이 들어가면서 힘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도 넌 기죽지 않고 긴 세월을 악착같이 버텨냈다. 늦게나마 큰 박수 보낸다.

너나 나나 낯선 사람들의 낯선 문화 속으로 들어와서 움츠리지 않고, 나대지 않고, 잔머리 안 굴리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특히 너는 동네 취미모임에 불과한 교민사회 무슨 단체에 내걸린 너절한 완장에는 전혀 관심 없이 오직 사는 것에만 충실했지.

요즘도 봐라. 나이 퍼먹을 만큼 퍼먹은 꼰대들이 푼수도 모르고 온갖 곳에서 지 잘났다고 설쳐 대다가 젊은 사람들에게 뒤통수에 손가락질 당하면서 빈정거림 당하지 않냐? 하여튼 교민사회는 할일 없어 빌빌거리는 꼰대들이 문제다. 너와 난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끝날까지 푼수를 잃지 말자.

친구야, 요즘 넌 괜찮냐? 난 잠자리에서 눈뜨면 제일 먼저 어제 저녁식사 메뉴를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어제 먹은 식사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 거야. 당황 되더라. 그 후 눈만 뜨면 제일 먼저 어제 저녁식사 메뉴를 생각한다. 다행히 아직까진 제대로 기억이 나긴 한다.

나를 잃어버린다는 알츠하이머 증상이 전날 먹은 식사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하더라. 그렇게 시작돼 가까운 일부터 잊어버리고, 공간과 시간개념을 잊어버리고, 관계를 잊어버리고, 기억을 잊어버리고, 가족을 잊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나는 아직은 이런 증상들에서 자유롭다고 생각되지만, 근자엔 느닷없이 공간개념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실 우울하고 불안하다.

애쓰고 열심히 살았던 세월이 어느덧 이렇게 흘러가버렸구나. 세월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도 따라서 흘러가는 거야 어찌해볼 수 없는 인생이란 걸 안다만 그래도 기억을 잊어버리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만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래야 오랜 친구인 너를 더 늙어서 만나도 기억하고, 반갑게 포옹하고, 밥이라도 같이 먹을 거 아니냐? 나도 너를 잊지 않겠다만, 너도 나를 잊지 마라. 그럴 수 있도록 더 많이 건강해라. 산다는 건 좋은 거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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