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

그때, 설날이었다. 엄청 추웠다. 늦은 밤 친구와 후배 2명과 설 맞이 막걸리를 마시고 들어선 골목은 쌓인 눈으로 환했다.

골목에서 두 사내와 두 여자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내들은 여자들을 끌고 가려고 했고 여자들은 버텼다. 우리는 사내들을 막았다.

싸움이 벌어졌다. 사내들을 두들겨 패 가해자가 된 우리는 파출소로 연행됐다. 소지품검사를 당했다. 친구 주머니에서 줄 끊어진 손목시계가 나왔다. 맞은 사내가 소리쳤다. “내 껀데!” 친구가 중얼거렸다. “싸우다가 주운 건데….”

용산경찰서로 이첩됐다. 형사가 나를 취조했다. 내용은 단순했다. 피해자를 폭행하고 손목시계를 강탈한 ‘특수강도’였다. 내가 두목으로 지목됐다.

담당형사가 뾰족한 펜대 끝으로 내 머리를 쿡쿡 찍으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새벽 4시 반이다. 지겹다. 니들 사람 패고 물건 강탈했지? 여기 손도장 누르면 간단하게 끝난다.” 나는 “여자들을 강제로 여관으로 끌고 가려는 사내들과 싸웠고, 손목시계는 싸우다가 친구가 길 위에 떨어져 있는 걸 주운 거다. 우린 강도가 아니다”고 했다.

담당형사가 가죽장갑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씨발놈! 오리발이네! 맞아야 불 놈이네!” 부옇게 날이 샐 때까지 맞았다. 강도가 아니라고 버텼지만 육체적 고통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맞는 걸 지켜본 친구와 후배들은 덜덜 떨면서 조서에 지장을 찍었다. 오후에 아버지가 세무사와 검사실 서기인 후배들은 조용히 풀려났다.

검찰로 송치돼 서대문교도소로 이송됐다. 항문검사까지 받았다. 꾀죄죄하고 푸르스름한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죄수번호 5265번을 받아 배정받은 7사19호실 앞에섰다.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나를 툭 치면서 아는 체했다. “깜빵 동창이네 씨이벌!”

간수가 감방 문을 열면서 들어가라 했다. 한데 선뜻 들어설 수가 없었다. 경찰서유치장에서 감방에 들어설 때 감방 문 앞의 ‘식판’을 밟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터였다.

식판 너머로 잠든 무리들의 머리가 줄지어 있었다. 식판을 밟지 않고는 들어설 수가 없었다. 간수는 빨리 들어가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감방 문이 닫히자 그와 나는 식판을 밟고 서있었다. 자는 줄 알았던 형상들이 부스스 일어났다. 그와 나는 식판을 밟았다는 죄로 한참을 두들겨 맞았다.

감방에는 열대여섯 명의 미결수들이 있었다. 미결수들은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 온종일 똑바로 앉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참이 들어오면 감방장 지시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신상털기를 했다. 나이, 고향, 가족, 학력, 죄명, 구속되기까지 상황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묻는 대로 고해성사하듯이 했다. 내용을 꾸미는 것 같으면 여기저기서 쌍소리와 주먹이 날아갔다.

한 고참미결수는 신참이 들어올 때마다 되풀이하는 자기 신상털기가 벌써 열 번째라면서 좆같다고 툴툴대더니 다른 고참에게 자기 신상털기를 들은 대로 대신 하라고 시켰다.

나와 감방 동창이라던 녀석과 친해졌다. 이름은 명환이었다. 명환은 칼자국 뚜렷한 오른팔이 구부정한 폭력절도 별 다섯 개였다. 그의 주거지는 서울역 건너편에 있는 창녀들이 모여 산다는 양동이였다. 양동에 있는 ‘행복세탁소’는 그의 옷장이었다. 행복세탁소에 고객들이 맡겨놓은 옷들을 외출하면서 골라 입고 다녔다.

그의 말대로 그의 ‘깔치’ 이름은 옥심이었다. 옥심이는 창녀다. 긴밤손님이 없는 날에는 옥심이 방에서 잔다고 했다.

옥심이가 면회 온 날이면 명환이는 저녁식사로 계란프라이 얹혀진 사식을 먹었고 기분이 좋았다. 명환은 옥심이 자랑을 했다. “말장화 신고 왔는데 끝내 주더라. 아 씨발!” 어느 날부터 명환이 우울해 했다. 옥심이가 며칠 째 면회를 오지 않는다며 주먹으로 감방 벽을 두들겼다.

기소, 불기소가 결정되는 마지막 날 밤 10시경 간수가 “5265번 나와!”라며 감방 문을 열었다. 어렴풋이 잠들었던 나의 등을 명환이 쳤다. 그러면서 내 손안에 뭔가를 쥐어주며 빠르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지 니는 나갈 거라고! 이거 행복세탁소 찾아가서 옥심이한테 전해주라.” 쪽지였다. 발가락 사이에 숨겼다. 어떤 내용이든지 외부로 쪽지 전달은 절대 금지였다.

기소유예를 받고 한달 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열흘이 지나서야 행복세탁소를 찾아갔다. 옥심이는 나흘 전에 동두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쪽지는 전하지 못했다. 미안했다. 쪽지에는 딱 한 줄 “옥심아 보고 잡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막된놈들 ‘어둠의 자식들’과 밥을 같이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추위를 견디려고 몸을 붙이며 등을 맞대고 잠잤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우했고 때로는 연약했다.

나는 설날이면 아직도 가끔은 전하지 못한 그 쪽지가 떠올라 가슴앓이를 한다. 내 아픈 기억이지만 나의 소중했던 추억들이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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