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남편의 절뚝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무릎연골이 파손되었다는 병원 진단이 나왔다. 만보 걷기 산행을 즐기더니 무리가 온 것 같다. 이층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든 남편은 땅이 고르지 못한 바깥에서는 위험하다고 집안에서 걷기 운동을 했다. 절뚝거리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이강우 선생님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삼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 첫 번째 수업은 도덕 시간이었다. 복도에 나가 있던 애들이 급하게 교실로 들어왔다. 숨 죽이고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박자가 안 맞는 발 소리가 나면서 교실문이 열렸다. 회색 양복에 머리는 전혀 손질을 하지 않은 더벅머리 남자 선생님,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얼굴은 길고 검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선생님은 왼쪽 다리를 약간 끌다시피 하며 교탁으로 향했다. 반 친구들의 시선도 선생님의 발을 따라 갔다.

선생님은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알았다는 듯이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그때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놀림을 받았지만 중학교 이후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마쳤다고 했다. 더 궁금한 게 없으면 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도덕의 정의에 대해서’ 라는 제목으로 칠판 가득히 썼다.  우리가 필기하는 동안 선생님은 운동장이 보이는 창문 앞으로 다가 갔다. 나도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을 보니 아무도 없는 정구장이 보이고, 그 끝에는 아름드리 큰 은행나무가 보인다. 새순이 돋는지 연초록의 옷을 입고 있다.

공부가 끝나자 친구들은 선생님 평가에 들어 갔다.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했고, 반지가 없으니 총각이고, 다리를 약간 절지만 분위기 있는 선생님으로 낙점이 되었다. 집에 와서 일기를 썼다.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선생님이 생각나면서 연민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잔잔한 파도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도덕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선생님은 상의가 없는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풋풋한 대학생 같은 향기가 났다. 눈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창문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을 훔쳐보았다.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쉬는 시간에 ‘내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옆 반의 정희에게 달려가 쪽지를 건넸다. ‘너,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거야’ 친구는 보이지 않고 쪽지만 공책 속에 숨어 있다. 그렇게 선생님을 사이에 두고 친구와 쪽지를 주고받으며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활달한 정희를 통해 선생님이 사시는 곳을 알아냈지만 찾아 갈 용기가 없었다.

개학이 되어 만난 정희는 나를 보자 마자 놀렸다. “하루가 여삼추 같았지?”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던 방학을 하루 하루 세면서 보냈으니 말이다. 다시 선생님을 만나고 마음의 쪽지는 늘어나고, 속으로만 밀려가는 나의 그리움은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채워졌다.

어느 날, 선생님과 맞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왔다. 내가 공부하는 교실은 3층건물이다. 삼학년은 3층에, 이학년은 2층에, 일학년은 1층에서 공부하고 화장실은 1층에만 있다. 내가 2층 계단 앞을 지나다가 계단 중간에서 책을 떨어뜨리는 선생님을 보게 되었다. 나는 황급히 뛰어올라가 책을 집어 드렸다. “학생 고마워” 하시면서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가 어찌나 애잔했던지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부끄러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내려왔다. ‘사랑하면 눈물이 많아지는 거야’ 정희의 멋대로인 해석이 날아왔다.

은행나무가 우아한 황금드레스로 옷을 갈아 입고, 갈색의 단풍잎이 소리 없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내 마음도 가을이 되었다. 하얀 함박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이 오면 내게도 그리움의 겨울이 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생각이 많아 졌고, 김소월의 ‘못 잊어’ 를 가슴에 안고 덕수궁 돌담길을 쓸쓸히 걸어 보고 싶어졌다. 친구는 드디어 시인이 되어간다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녀의 말이 싫지가 않았다.

학교 동산에 노랗게 핀 개나리와 함께 2학년이 시작되었다. 도덕과목은 없다. 그 과목은 일학년만 공부했다. 선생님이 궁금했다. 친구가 가져온 소식으로는 학교를 그만 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살며시 교무실 창가로 갔다. 더벅머리 뒷모습만 물끄러미 훔쳐보았는데 그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슬픔이 물줄기가 되어 가슴속으로 흘렀다. 친구 정희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나의 사랑은, 바다를 건너 구름 따라 흘러갔지만 그 아픔은 오랫동안 마음 한쪽에 고여 있었다.

요즘은 소아마비 백신이 있고, 세계적인 퇴치 운동으로 소아마비 환자가 거의 없다. 가난했던 1960년도에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을 가다 우연히 절룩거리는 젊은 남자를 만나면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세월이 저만큼 물러가고, 나의 서러운 시간도 희미한 흔적을 남기며 지워져 갔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났다. 지금은 선생님 얼굴도 아련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십대였던 나의 아름다운 짝사랑, 추억의 영화가 되어 내 마음을 붙잡는다.

 

 

글 / 이정순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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