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 나누는 것

당신들은 ‘공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공짜라면 사양하지 않았었다. 공짜란 힘이나 돈을 들이지 않고 거저 얻는 것을 말하는 거다.

공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공짜가 있고, 음흉한 계산이 깔린 공짜가 있고, 생색내기 위한 공짜가 있다.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공짜는, 공기, 태양, 산, 숲, 바다, 강 등등에서 얻는 우리네 생명과 직결된 에너지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자연의 선물이다.

음흉하게 계산된 공짜 란,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뭔가 부정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사전포석 된 공짜다. 생색내기 공짜란, 이것도 일종의 계산된 행동인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던져주는 홍보성 공짜를 뜻한다. 그러나 세상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돕고 싶어, 위로하고 싶어, 나누고 싶어 건네주는 아름답고 순수한 공짜도 있다.

엊그제 테니스동호인이 뜬금없이 그립 밴드를 공짜로 건넸다. 그립 밴드는 라켓 손잡이에 감아 손 미끄럼을 방지한다. 가격은 2불 정도로 거저 받기에 크게 부담되는 것은 아니다. 홍콩 출신인 그는 게임에서 스코어에 몰리면 제 파트너에게 짜증을 부리곤 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와 난 서로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공짜 선물을 내민 거다. 내가 그에게 ‘주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나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는 ‘화해’라는 제스처가 있었다. 그가 생색내면서 ‘주는 것’이라고 했다면 나는 받지 않았을 거다. 나는 기분 좋은 공짜를 받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양잿물은 잿물에서 나온 이름이다. 잿물이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옷의 때나 기름기를 빼는데 사용됐다. 그런데 개화기 이후에 들어온 수산화나트륨이 사용의 간편함과 강력한 세척력으로 잿물 대신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산화나트륨을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이라 하여 ‘양잿물’이라 부르게 된 거다.

양잿물은 강한 염기성을 가진 흰색의 고체덩어리다. 양잿물은 피부와 눈에 닿으면 화상이나 실명을 가져올 수 있으며 섭취하면 혼수상태를 유발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공짜를 얼만큼 좋아하는지를 이런 양잿물을 들어 풍자한 거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공짜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 그러나 공짜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도층이나 권력층들이 비리혐의로 법정을 드나드는 것은 받아서는 안 되는 것들을 공짜라고 해서 앞뒤 생각 없이 덥석 받아버린 결과다.

‘나누는 공짜’가 아닌 ‘주는 공짜’를 좋아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공짜 좋아하는 것도 가려서 좋아해야 하는 거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패가망신하고 몸뚱이 상하는 진짜 양잿물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건강식품사업으로 성공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가 전화를 했다. 내가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면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교민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사기를 질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는 성공했다고 하지만 듣기에 고약한 흉흉한 뒷말도 많았다. 그의 초청으로 그가 주축인 골프 모임에 참석했다. 만나보니 그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골프가 끝나고 왁자한 뒤풀이도 끝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송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며 한 보따리의 건강식품을 건네주었다.

못이기는 척 억지로 받아 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물 받은 보따리를 아내에게 건네주면서 건강식품사업 하는 친구가 나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헛기침을 늘어놓으면서 은근히 건방을 떨었다. 방송국 운영한다면서 생활비도 넉넉히 못 가져다 주는 아내를 위로하고 나 자신의 무능함을 그렇게라도 으스대고 싶었던 거다.

며칠 후 아내가 받아둔 건강식품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으면서 이걸 준 게 친구가 맞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거 모두가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것들이라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했다. 아내는 공짜 좋아하지 말라고 쓴 소리를 해 나를 무안케 했다. 나는 너무 너무 어이가 없어 쓴 웃음만 나왔다. 하마터면 양잿물을 마실 뻔 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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