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나갔냐?

민아, 하늘이 찌뿌둥 하다. 지난주는 내내 맑은 날이었는데, 어제 그제는 사납고 모질게 바람이 불어 댔다. 그러더니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날이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들이 되풀이되는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이런 날들을 볼 때마다 새삼스런 얘기 같지만, 세상살이가 어쩜 이렇게 날씨와 같냐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제는 바람이 세찼지만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게 너무 답답해 테니스코트에 나갔다. 혹시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 내리고 천둥 치는 하늘을 원망스런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나뭇잎 아래 몸뚱이를 숨기고 하는 일 없이 두 눈만 껌벅거리던 개구리들처럼 폴짝폴짝 많이도 튀어나왔더라. 나를 포함해서 힘 빠지고, 쭈글쭈글하고, 말만 많고, 지가 잘못한 일들에는 변명하기에 습관이 돼버린 늙은 개구리들만 나왔더라.

싱싱하고 탄력 넘치는 젊은 개구리들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일 나가느라고 대낮에는 테니스코트에 나올 시간이 없을 거다. 그렇지만 하릴없이 세끼 밥만 축내며, 외로워 못살겠다는 늙은 개구리들은 비록 바람이 거세게 불지라도 웬만하면 테니스코트로 몰려나와 개골개골대곤 한다.

늙은 개구리들은 테니스가방에 별별 것들을 다 넣어가지고 나온다. 물, 초콜릿, 박카스, 바나나 (근육 뭉침에 좋단다), 딸내미가 구워 줬다는 쿠키, 전립선에 좋다는 토마토… 계절 따라 종류도 가지가지다. 가져온 것들을 자랑하듯 꺼내 나눠 먹고, 나눠 마시고, 낄낄대면서, 칭찬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혹시 빈손일지라도 아무도 무참하지 않다.

어제는 언제나처럼 손바닥만한 텃밭에 물주고 테니스코트에 나가서 2시간도 넘게 테니스 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내 팬티랑 양말 빨고 나니 오후 1시쯤 됐다. 뭐 먹을 것이 있나 해서 솥단지를 들여다보니 말끔히 설거지 돼 텅텅 비어있었다. 이럴 땐 라면이 최고다. 아무 반찬도 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꿀맛이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점심을 해결하고, 인터넷을 뒤적여 한국 뉴스를 보고 나서 (볼 때마다 난장판, 개판인 뉴스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결심하지만 작심 사흘이다. 아니 작심 한낮이다) 막내 손녀 픽업해 치어리딩 학원에 데려다 줬다. 저녁 먹고 또 텃밭에 물주고 인터넷바다를 헤집고 다니다가, 10시쯤에 자리에 누웠다. 어둠 속에 누워 살아온 날들을,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잠든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나간 일들을 돌이키며 후회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거리이고, 앞날을 그려보는 것은 쓸데없는 망상가들의 만화 그리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쉬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고 오늘에만 충실 하라고 충고한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뚜렷하게 하는 일 없는 나는 여전히 과거의 수레에서 내려오지를 못한다.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딱 그 짝이다. 과거의 수레에서 내려오지 못하니 후회하고 한숨 쉬는 시간만 늘어난다. 그럴지라도 나는 그 시간들을 헤매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

오늘은 새벽에 누운 채 머리맡 창문 커튼을 살짝 제키고 한눈으로 훔쳐본 동녘 하늘이 파랗고 맑았다.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자리에서 일어나 혈압 약을 먹고 주방으로 내려가 냉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텃밭에 물 뿌려줬다. 식구들은 모두 제각기 할 일들로 외출했다. 솥단지를 열어보니 밥이 그득하고 냄비에는 된장국이 따뜻하다. 하지만 입맛이 없다.

쇼핑몰에 나가 아침식사로 내가 좋아하는 파이를 하나 샀다. 바닥이 보이는 집 지킴이 ‘테디’ 밥도 한 포 샀다. 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음이 기분 좋다. 파이를 데우고 커피를 끓여 아침을 때웠다. 나만의 만찬을 즐긴 후 설거지하고 나면 오늘 하루 나의 일은 대충 끝이다. 아 참, 오후에 손녀들 픽업할 일이 남아있다.

이런 것들이 나의 일이다. 너는 왠지 쓸쓸하고 허허롭고 한숨 나는 일들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설레게 하는 나의 일이다.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다 이런 일들이라도 있음에 나는 정말 감사한다. 민아, 오늘 일 나갔냐? 피곤하다고 누워있지 마라. 무슨 일이든 신나게 해라. 그게 살아있는 거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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