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말해야겠다

교민사회에 언론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나름 최선을 다하는 교민신문이 있었다. ‘그 신문’이 4개월 전에 문을 닫았다. 2001년에 선보였으니 20여년을 교민들과 함께 숨쉰 신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 신문 2002년 2월 2일자에 ‘등뒤에서 총 쏘는 자’라는 칼럼을 썼었다.

호주나 캐나다나 미국이나 지구촌 곳곳의 교민사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뉴질랜드 교민사회의 ‘교민언론’은 정부기관의 허가나 신고가 필요 없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잡지든 상관없다.

그러다 보니 속된말로 ‘게나 고동이나’ 신문도 하고 방송도 하고 잡지도 한다. 나도 ‘게나 고동’이었다. 그들 중에는 언론에 대한 기본개념도 없이 자신의 과거를 허풍 치며 언론인으로 행세하는 인물도 있다.

인터넷의 눈부신 발전으로 취재의 수고로움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바다를 무단항해 하면서 열심히 ‘베끼는 언론’이 교민언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신문은 발로 뛰면서 교민사회의 살맛 나는 이야기들과 잘 못된 일들을 교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 신문은 올곧은 기사를 쓴 이유로 돈푼 깨나 있다는 한 교민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그리고 패소했다. 역시 돈은 힘이 세다.

내면이 빈곤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살아가는 삶이 몸에 배어버린 인간이 자신의 치부가 들어날 때 되레 큰소리치는 것이 바로 명예훼손임을 우리는 선험적 혹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곁에는 충성스런 애완견 같은 인간도 기어코 있다.

교민사회의 리더라고 자임하는 김씨, 이씨, 홍씨가 의기투합했다. 세 사람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인회관’이라 명명한 집 짓기 모금운동을 전개하자고 합의했다. 필요한 금액이 모금되지 않으면 부족분을 공평하게 1/3씩 나눠 내기로 약속했다.

기대와는 달리 모금액수는 부족했다. 세 사람은 부족한 금액을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한인회관’을 마련했다. 이제 세 사람은 자기들 약속대로 1/3씩 나눠내면 만사 아름다운 ‘명예’였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탐욕이 얼굴을 내밀면서 처음의 그 아름다운 약속은 뭉개져 버리고 말았다.

세 사람은 각자 내놓기로 한 몫과, 모금액수의 차이와, 횡령과, 한인회관 관리권을 가지고 소송을 벌리며 이전투구를 이어갔다. 모든 ‘교민언론’은 이 싸움질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했다.

오직 그 신문만이 논단을 썼다. 세 사람간의 암중비약 (暗中飛躍)을 공개하면서 “제발 당신들의 그 천박한 싸움판에 교민사회를 더 이상 끌어들이지 말라”고 질타했다. 나는 ‘나설 사람만 나서라’는 칼럼으로 그들의 행태를 꾸짖었다. 발끈한 ‘이 씨’가 그 신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동종업계 한 교민신문이 기다렸다는 듯 충견답게, 이 씨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섰다. 그리고 그 신문을 향해 ‘등뒤에서 총 쏘는 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사실마저 교민언론은 침묵했다. 이것이 입으로는 상생을 떠들면서 행동으로는 상대의 살점을 찢는 교민언론의 민낯인가?

가슴 아프고 낮 뜨거운 이야기지만, 지구촌 어디나 한국인이 모여 사는 교민사회라는 곳에도 돈 좀 가졌다고 소문나면 그 인간이 저지른 반칙, 부정, 비리를 눈감으며 머리 조아리고 손바닥 비비고 그 인간이 뻐기는 궁전 요트에 불러주심에 감읍해 어쩔 줄 모르며 양주 한잔 하사하심에 충성을 다짐하는 ‘언론’이 있다. 비평과 비판이 없는 언론, 반칙과 특권을 지적할 줄 모르는 언론, 거짓과 위선에 눈감은 언론이 과연 언론인가?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내 가족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다. 나는 내 가족에게 비록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반칙과 비리로 얼룩진 자 앞에 굽실거리지 않고, 손바닥 비비지 않고, 사람으로서 가치와 도리를 지키며 살았다는 칭찬만은 듣고 싶다.

사족이다. 나는 ‘그 신문’이 문닫은 후 뉴질랜드에서 18년 넘게 써오던 칼럼을 미련 없이 접었다. 하나 더, 지난 6월 13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세계 주요 38개국에서 진행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언론신뢰도가 최하위였다고 발표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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