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2000년의 도도한 역사가 흐르는 곳

이스탄불 (Istanbul)이라는 터키 식 이름을 갖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대 그리스의 한 마을로 그 당시 비잔티움 (Byzantium)으로 불리던 이곳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또는 콘스탄틴 Constantine: 재위 306-337년) 황제이다.

 

01_1453년 이스탄불로 개명하며 오스만제국과 새로운 인연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재위 284-305년) 황제를 이어 즉위하고 이곳에 새로운 동로마제국을 건설하면서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콘스탄틴이 세운 도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동로마제국의 수도로서 1100년을 버틴 도시는 마침내 1453년 메흐메드 2세 (Mehmed II)의 끈질긴 공격에 무너지고 이스탄불로 개명을 하면서 오스만 (Ottoman)제국과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이스탄불의 주요 명소가 모여 있는 구도심이 바로 술타나멧 (Sultanahmet)이다. 역사에 온 몸을 담그고 싶어 숙소도 당연히 이곳에 잡았다. 숙소 뒤에 자리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동로마제국 시절 모든 행사가 열린 거대한 스타디움이 있었던 히포드롬 (hippodrome)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의 이름이 오늘날에는 술타나멧으로 불린다.

물론 스타디움의 흔적은 이제 없다. 가는 길목에서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진 콘스탄틴 탑 (Column of Constantine)을 만난다. 건립 당시 탑 꼭대기에 세워진 아폴로 신 모양의 콘스탄티누스 동상은 이제 없고 지난 세월과 함께 한 지진과 화재로 지금의 탑은 그을린 채로 남아있다.

콘스탄틴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Constantius)는 비천한 가문 출신의 군인이었지만 자신만의 노력으로 황제의 경호까지 담당하게 된다. 어느 날 밤, 술집에 들른 콘스탄티우스는 술시중을 하던 헬레나 (Helena)와 눈이 맞는다.

 

02_디오클레티아누스, 내란과 외침 종식시키고 경제 재건도

그리고 얼마 후 그들 사이에 콘스탄틴이 탄생한다. 경사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과거 황제의 경호팀으로 같이 한솥밥을 먹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오르자 그는 로마제국 한 식민지의 최고 통치자로 발령을 받는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하자 내란과 외침을 종식시키고 휘청거리던 경제도 재건한다. 방대한 로마제국을 혼자 다스리기에는 일이 많다고 판단한 그는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동쪽을 니코메디아 (Nicomedia, 지금의 이즈밋 Izmit인데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에서 자신이 통치하고 서쪽은 자신의 충신인 멕시미안 (Maximian) 장군을 등용하여 밀라노 (Milano)를 근거지로 통치를 맡긴다.

그리고 둘은 같이 아우구스투스 (Augustus, 로마 초대황제)라는 타이틀을 나누어가진다. 얼마 후에는 이 두 황제 밑에 부황제 (sub-emperor)직을 만들어 그들에게 시이저 (Caesar)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고 황제를 보필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사두정치 (tetrarchy)이다.

그사이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와 이혼하고 멕시미안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다. 최소한 부황제직이라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아버지와 떨어져 엄마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스리던 동로마로 온 콘스탄틴은 교육도 잘 받고 가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도 참여하여 서서히 정치의 속성을 익히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치를 잘했다.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나누어 각 지역은 책임자들이 군대와 행정의 명확한 구분 하에 통치를 하게 했으며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는 것을 미연에 막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03_칼레도니안 소탕 전쟁에 뛰어들면서 싸움기술 연마

군인의 이미지를 풍기는 의상 대신에 자주색 (purple)의 긴 실크 가운을 입었고 루비가 박힌 샌들을 신었으며 모든 방문객이 자신을 알현할 때 무릎걸음으로 들어와 자신의 가운에 입맞춤을 하게 하였다. 농부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황제로 그리고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게 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술을 콘스탄틴은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도 32세가 되어서야 크리스푸스 (Crispus)라는 아들을 얻는다. 4세기 초 무렵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큰 병치레를 하고 나서야 장군들과 재상들을 불러모아 그 어느 황제도 하지 않았던 선언을 한다. 황제직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황제인 멕시미안도 은퇴를 하고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 (Galerius)가 직을 이어받는다고 발표를 한다. 이제 새로운 부황제 두 명이 발표되어야 하는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과 멕시미안의 아들인 멕센티우스 (Maxentius)가 임명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갈레리우스와 가까운 두 명의 이름이 발표된다.

이는 곧 콘스탄틴과 갈레리우스가 서로 적이 되는 상황이 된 셈이다. 그날부터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감시하기 시작하고 콘스탄틴은 탈출의 기회만 엿보게 된다. 어느 날 밤, 콘스탄틴은 갈레리우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의식이 몽롱한 그로부터 니코메디아를 떠나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낸다.

지체할 시간도 없이 콘스탄틴은 먼 길을 달려 오늘날 프랑스 지역에 주둔해 있는 아버지와 재회를 한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 땅으로 건너가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재위 117-138년) 황제 당시 건설된 하드라아누스 장벽 (Hadrian’s Wall)의 북쪽에 있던 칼레도니안들을 소탕하는 전쟁에 뛰어들면서 싸움의 기술을 연마한다.

 

04_요크 대성당 앞에는 콘스탄틴 동상이

얼마 후 자신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가 병을 얻어 사망하자 모든 장수들은 콘스탄틴을 서로마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한다. 이 추대 사건이 오늘날 런던에서 북쪽으로 340킬로미터 떨어진 요크 (York)에서 일어났다. 이를 기념하여 요크 대성당 (York Minster) 앞에 콘스탄틴 동상이 세워져 있다.

콘스탄틴은 즉시 갈레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음을 알리는데 자주색 긴 실크 가운을 입고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동봉하는 무모함도 발휘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장 시기와 불편을 느낀 사람은 다름아닌 멕센티우스였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일부 군인들이 이태리 반도 쪽의 황제가 되도록 멕센티우스를 부추긴다. 멕센티우스는 은퇴한 자신의 아버지 멕시미안을 콘스탄틴에게 보내 관계개선을 꾀한다.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멕시미안의 딸인 파우스타 (Fausta)를 아내로 맞는다. 첫 여자를 버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같은 방식의 정략결혼을 한 셈이다. 잠시나마 로마제국에 세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생겼다. 이후 콘스탄틴은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갖게 되지만 첫 아들인 크리스푸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정치적 혼돈의 시기는 계속되었다. 그 사이 갈레리우스는 대장암으로 죽고 내전은 그칠 줄 몰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했고 계속되기를 원했던 사두정치의 근간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콘스탄틴과 멕센티우스 사이에 유지되던 아슬아슬한 동맹관계도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프랑스 쪽에 주둔해있던 콘스탄틴 군대는 312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태리 북쪽으로 진군한다. 이때 콘스탄틴의 나이는 40세. 목표는 자신의 처남인 멕센티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북쪽의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로마로 진군하던 콘스탄틴은 결전을 앞두고 꿈을 꾼다.

 

05_하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 가장 찬란하게 빛내주는 건물

태양을 바라보던 콘스탄틴 눈에 그리스도 (Christ)라는 그리스어인 카이 (chi, P)와 로 (rho, X)가 X 한 가운데로 P가 들어간 형태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억압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나타내는 마크로 이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분명 신의 계시라고 해석한 콘스탄틴은 다음날 군사들의 방패와 깃발에 카이로 마크를 새기도록 지시한다.

성안에서 콘스탄틴 군대를 맞아도 될 상황인데 멕센티우스는 과감히 성문을 열고 앞에 흐르는 강 위에 다리를 급조하여 무모하리만큼 콘스탄틴 군대와 대적한다. 결국 멕센티우스 군대는 대패하고 멕센티우스 자신도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 로마제국이 콘스탄틴 혼자만의 손아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계시로 사도 요한 (Saint Paul)이 체험한 극적인 영적 경험과 가끔 비견되는 콘스탄틴의 꿈 계시 이야기는 아마 훗날 콘스탄틴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700년 전 콘스탄틴이 장려한 그리스도 종교가 오늘날까지 전 분야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꿈 이야기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의 화려한 업적 뒤에는 서로 정분을 맺은 첫 아들 크리스푸스와 두 번째 부인 파우스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비극도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술타나멧 광장 한쪽에서 이스탄불을 가장 찬란하게 빛내주는 건물이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상관없이 박물관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져 있다. 거대한 건물을 보면서 옆에 있는 아내가 한마디 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부가 동원 되었을까?”

 

06_조카들이 앉을 의자 세 개 미리 준비, 한 의자 밑에는…

아내의 여성스런 말에 나는 남성스런 말을 보탠다. “황제로 즉위 하기 전에 이민족에게 뺏긴 북아프리카와 이태리 반도를 다시 로마제국으로 되찾고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평판이 안 좋은 여자와 결혼을 했으며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에서도 살아남아 반나절 만에 콘스탄티노플 인구 10분의 1을 잔인하게 죽인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 또는 Justinian: 재위 527-565년) 황제에 의해 537년에 건립이 되었다”고.

5세기 후반 무렵 콘스탄티노플 주변국에서 돼지 농사를 짓던 유스티누스 (또는 저스틴, Justin)는 두 친구와 함께 베낭만 메고 꿈을 좇아 무작정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운이 좋아 그들은 바로 왕궁의 수비대에 일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저스틴은 곧이어 아나스타시우스 (Anastasius, 재위 491-518년) 황제의 경호실장이 된다.

노비 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저스틴은 누나의 아들인 열두 살짜리 조카를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한다. 일자무식인 자신에 견주어 유스티니아누스에게는 그리스와 라틴 문화가 통합된 최고의 교육을 시킨다.

20대가 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연스레 왕궁 수비대에 참여를 한다. 자식이 없던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말년 무렵 누구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까 고심을 하다 어느 날 세 명의 조카를 부른다.

조카들이 앉을 의자 세 개를 미리 준비하고 한 의자 밑에는 REGNUM (통치라는 의미) 글자가 박힌 얇은 동물 가죽을 숨겨둔다. 그 의자에 앉는 조카에게 황위를 양도할 요량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조카가 한 의자에 같이 앉는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아무도 그 의자에 앉지 않게 된다.

 

07_로마대법전… 오늘날 유럽국가들이 갖는 시민법의 근거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 황제는 기도를 통해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실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람에게 양도를 할 계획을 세운다. 바로 경호실장인 저스틴이 다음날 아침에 황제를 누구보다 먼저 알현을 하면서 일약 아나스타시우스에 이어 황제가 된다.

무지한 삼촌을 대신하여 영악한 유스티니아누스가 뒤에서 조정하였다고 역사가들이 입방아를 찧기도 하는 코미디 같은 사실이다. 이미 60대 후반으로 접어든 저스틴은 치매 증세까지 보여 황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모든 대소사를 조카이자 아들인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맡길 수밖에….

젊은 30대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미 실질적인 동로마의 통치자나 진배 없었다. 더 나아가 유스티니아누스는 남자 편력이 심했던 창녀 출신의 20대인 테오도라 (Theodora)와 결혼한다고 발표한다. 귀족 출신인 유스티니아누스가 가무를 하는 하류층의 테오도라와 결혼을 하는 것은 당시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삼촌인 황제를 구슬러 허락을 받아낸다.

결국 527년 저스틴 황제가 세상을 뜨자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황제와 황비로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즉위를 한다. 좋은 음식과 화려함을 추구하고 늦잠을 자는 테오도라와는 달리 유스티니아누스는 일중독자였다. 당시 혼란스럽던 법을 정리하여 로마대법전을 만드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이 법이 오늘날 유럽국가들이 갖는 시민법의 근거가 되었으며 미국 하원의 한 방 사면 벽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판에 23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이 새겨져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가 그 중 한 명이다. 미국법의 근간을 만드는데 그가 끼친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08_그리스 신들에 대한 숭배 금지, 동로마제국 일신에 심혈

또한 그는 그리스 신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고 동로마제국을 일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스타디움에서는 말이 이끄는 전차경주 대회가 적대관계의 두 팀에 의해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인기에 편승하여 두 팀은 나중에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끼친다. 팀의 위세가 극에 달하면서 이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저지르는 악행도 도가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을 정치에 이용하고자 정작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들의 비행에 눈을 감는다.

세월이 흘러 그들 중 범죄행위가 지나친 7명이 사형언도를 받는데 사형이 집행되던 날 설치대가 무너져 죄수 두 명이 살아남아 도망쳐 교회로 숨어든다. 팀 리더들이 황제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을 하지만 묵살된다.

급기야는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를 향해 야유까지 한다. 그리고 시내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방화와 탈옥이 이어지고 황제의 진압 노력에도 폭동은 계속된다. 결국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고 탈주할 것을 재상들과 논의하는데 황비인 테오도라는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극구 반대한다.

이에 자극을 받아 황제는 폭도들과 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장수들을 소집하는 한편 폭도들을 유인하여 스타디움에 모여들게 하여 수만 명을 도륙한다. 다시 안정된 권력을 잡게 된 황제는 드디어 하기아 소피아 건축을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09_하기아 소피아… 900년 동안 성당, 500년 동안 이슬람사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기아 소피아는 900년 동안 성당 역할을 했고 그 후 500년 동안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였다. 노아의 방주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가 사용되었다는 웅장한 직사각형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돔 천장이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는 아내가 환한 미소를 띄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뱉어내는 소음만 없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얼마든지 영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13세기 초 제4차 기독교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본래의 신앙적인 목표를 내팽개치고 세속적인 탐욕에 이끌려 종교적 형제인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대신 침공한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는 처참하게 유린된다. 수많은 문화재와 보석들이 약탈된다. 하기아 소피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금으로 된 대부분의 타일이 없어져 지금은 몇 개의 모자이크만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바닥은 1000년 이상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발자취에 닳아 매끌매끌하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이층으로 올라가 다른 각도에서 사원 내부를 둘러본다. 그곳 창문을 통해 건너편에서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만든 또 다른 거대한 사원인 블루 모스크 (Blue Mosque)가 손짓을 하고 있다.

 

10_두 개의 돌기둥 기저에 뱀 형상 머리카락 메두사 얼굴이

1544년 피에르 질 (Pierre Gilles)이라는 지형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프랑스 과학자가 이스탄불을 방문한다. 이때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간 지 약 100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아직도 시내 곳곳에는 로마제국의 흔적들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이런 유적들을 기록해가던 피에르는 어느 날 아야 소피아 (하기아 소피아라는 성당 이름은 아야 소피아 Aya Sofya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이슬람 사원이 된다) 근처 집 마당에 있는 구멍을 통해 사람들이 지하에서 물을 길어 먹는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흥미롭게 생각한 피에르는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보기로 한다. 다음날 이 집을 방문하여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한다. 곧이어 집 주인과 같이 지하로 내려가 칠흑같이 어둔 지하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를 듣게 되고 나서 기름 심지에 불을 밝혀 작은 배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지하를 탐험한다.

거대한 돌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져 있으면서 이 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하 예배당이 물에 잠긴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이것이 로마시대 때 만들어진 지하 물저장소 (시스턴: cistern)임을 알게 된다. 정식 이름은 바실리카 시스턴 (Basilica Cistern)인데 침수된 궁전 (sunken palace)이라고도 불린다. 6세기경 통치를 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물이 부족한 콘스탄티노플 사정을 고려하여 만든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물을 전부 빼내고 전기불로 밝게 해놓아 누구나 쉽게 계단을 이용하여 내려가 이 지하 물 저장소를 볼 수 있다. 수많은 돌기둥 (총 336개, 건립 당시 주변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던 예배당에서 옮겨 온 것)을 지나 시스턴의 가장 뒤쪽까지 걸어가면 두 개의 돌기둥 기저에 뱀 형상의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 (Medusa)의 얼굴이 있다.

 

11_하나는 메두사가 옆으로, 다른 하나의 메두사 얼굴은 거꾸로

하나는 메두사가 옆으로 보고 있고 다른 하나의 메두사 얼굴은 거꾸로 되어 있다. 아내가 이 섬뜩한 모양을 보고 기겁을 한다. 어떤 이유로 이런 식의 메두사 돌을 배치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스탄불을 동로마제국 시절 황제들의 혼들이 아직도 돌아다닌다고 믿으면서 이 도시를 일컬어 어둠의 제국 (ghost empire)이라고 부른다.

과거 이 도시에서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에 너무 심취된 나는 동양과 서양이 나뉘는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을 유람하고 나서 길거리에서 파는 고등어 샌드위치를 덥석 사먹었다. 이것이 내 생애 최악의 식중독 배탈이 될 줄이야…. 다음 날 이태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아뿔싸 내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유럽 일정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로마제국의 몰락이 못내 아쉬워 어떤 황제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정녕 이스탄불은 어둠의 제국이었던가?

* 이 여행기에 적힌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호주 저자인 리차드 피들러 (Richard Fidler)가 집필한 역사책 ‘Ghost Empire (총 492페이지, 2016년 발간)’에 근거하였다.

 

 

박석천 교수의 '따로 또 같이' 여행기 ⑥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 ...글 / 사진: 박석천 (찰스스터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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