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대왕

최근 어떤 베스트셀러 소설에서 ‘은대왕’이란 용어를 만났다. 집에서는 ‘은따 (은근한 따돌림)’ 회사에서는 ‘대따 (대놓고 따돌림)’ 그리고 세상에선 ‘왕따 (세상의 따돌림)’ 뜻이라 했다. 신체 (언어) 폭력이 포함된 ‘이지메, 학폭’ 같은 청소년 범행과는 다른 성인 내용이다.

범법행위 전 단계의 선도개념으로서 따돌림은 들을 때마다 청소년 교육의 심각성과 중요성으로 인식되면서 그 대책을 고심하지만, 성인 따돌림 문제의 국가적 또는 사회적 고심은 없었다.

사실 ‘은대왕’은 세대구분 없이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상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나 청년이 되었을 때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울 때도 이런 단어를 본 적이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은퇴 삼 년 차인 지금 새삼스럽게 이 단어가 강하게 꽂히고 있다. 생각해 보니 현재와 과거의 내 모습들 속에서 참 유사한 ‘따’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만리동 꼭대기에 원서만 내면 입학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야간고를 입학했다. 신입생을 위한 일곱 개 반 중 마지막 반의 이름은 F반이었다. 삼차까지 낙방해서 어쩔 수 없이 입학했다는 55년 지기, 가끔 등교하는 미들급 권투선수, 매월 서대문 병원에서 피를 판다는 친구, 장래에 정치를 하겠다며 항상 목에 힘주고 다니던….

참 다양한 아웃사이더들을 이곳에서 많이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공부한 적도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기억도 없다. 당연히 공부 잘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가장 먼저 내 인생 최초로 개근상을 타볼 생각을 했다.

공부는 잘 못해도 삼 년 개근을 할 수 있다면 졸업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한 것은 가능하다면 공부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은 쉬운 것부터 죽어라 암기하면 될 거라 판단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생각들은 참 현실적이었다. 지금까지도 스스로 자랑하는 ‘삶의 기본자세’로 믿고 있다.

이후의 내 삶에서 꿈 같은 불가능한 계획은 내 사전에 없었다. 항상 불가함을 알아차렸을 땐 즉시 현실에 맞게 바꾸어나갔다. 스스로 주제 파악을 했고 거기에 합당한 실천을 해나갔다. 교실, 집, 직장 그리고 길에서도 나는 정신 없이 바빴고 항상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초기에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대부분 반 친구는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들어낸 따돌림이었다.

3년의 학교생활은 교문에서 100미터 정도의 학교 건물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서 시작했다. 길 좌우에 세워진 명언들을 읽고 생각하고 음미하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매번 처음 느끼는 신나는 순간이었다. 힘든 하루를 잊고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삶의 의지를 다지는 장소였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갈 수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직업은 무엇이든지 좋다. 일인자가 돼라,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내 인생의 좌우명들이 55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에 들어와 한 알 한 알 박혀 있다.

나에게 있어 이 학교는 깡패 학교가 아닌 명문 고교였다. 나는 지금도 이곳에서 성실과 근면이 가장 중요한 내 삶의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편모슬하의 가혹했던 가난한 삶. 냄새 나는 식당의 다락방. 손님들이 남기고 간 잔반들과 찌개들.

연중 몇 번씩의 이사와 그때마다 만나는 연탄가스 중독.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캄캄했던 방. 소년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고2 때엔 새로운 꿈이 생겼다. 공부할 책상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책상은 무슨? 책상 놀 자리도 없는데’ 거역할 수 없는 현실.

허리 펴고 누울 자리도 좁아 여동생도 외가에서 못 데려올 때였다. 그래도 그 당시 공부만 하는 대다수 학생과 내가 분리되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생각은 사치였다. 경제력과 부모의 유무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후진 (개도)국의 사회 보편적 따돌림이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의 방황. 공장 생활 중 인사동 길목에서 만난  ‘하얀 교복의 군집들. 그 속을 헤집고 밀치고 다녔던 초라하고 한심한 내 첫 모습. 나와 비슷한 집단들인데 그들과는 전혀 딴 세상 속에 분리된 요즘 말로 따돌림을 본능적으로 그냥 알았음이다.

무조건 그 하얀 집단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필요한 것들을 망설임 없이 하나 하나씩 실천했었다. 1966년부터 32년간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행복한 삶을 만들어낸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 안정된 삶의 길목에서 예상 못했던 천지개벽을 갑자기 만났다. 기가 막혔다. ‘IMF 사태 (학력기득권) 집단’들의 불법 따돌림으로 만들어져 낙오된 초라하고 한심한 내 인생 두 번째 모습. 무너진 32년의 탑. 이년의 준비와 실행 한달 만에 당당히 원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신은 그대로 남았고, 정년 14년을 남기고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중고생 두 아들을 무조건 이 사회에서 분리하고 싶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민 준비로 이 모든 분노를 잠재웠다.

노동판 호주 이민. 또 다른 실패와 성공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안정적인 새로운 삶에 섰다고 믿었다. 그리고 또 다른 ‘따’를 만났다. 변해가는 세상. 두 아들과 아내 얼굴 보는 것들이 옛날 같지 않은 것이다.

한국 은퇴 남성들의 공통된 소외감 ‘따’의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엔 초라함과 한심함, 억울함과 분노가 없다. 사실 ‘따’는 무한 변화하는 삶의 하나이고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아닌가. 힘 빠진 은퇴자 ‘은대왕’은 당연한 거다.

그러니 괜찮다. 평생 한 번도 못해 본 것들 하나 하나 해보는 새로운 삶. 오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나에게는 여전히 매일 매일이 새롭기 때문이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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