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2팩 사과 6개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이라는 소설은 내가 아껴 읽었던 여러 고전 중의 하나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낭만파 시인이며 소설가 겸 극작가인 빅토르 위고 (Victor Marie Hugo 1802년~1885년)의 작품으로,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노틀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와 함께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레미제라블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 200여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이유는 그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사회성 때문일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들어낸다. 사람들은 레미제라블보다 ‘장발장’을 더 익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장발장은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이다. 장발장은 누이동생과 어린 조카들을 부양하면서 굶주리고 헐벗은 삶을 살아간다. 장발장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가 절도죄로 체포된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탈출을 시도하다 다시 체포되어 19년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긴 세월의 징역살이를 한다. 가난, 굶주림, 빵 한 조각, 징역이라는 단어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제도와 관습을 고발하는 외침인 것이다.

한국의 어느 서른 살 넘은 아버지와 열두 살 된 아들은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 CCTV로 현장을 감시하던 사장에게 발각됐다. 아들의 등에 맨 배낭 속에는 훔친 우유 2팩과 사과 6개 그리고 마실 음료 몇 개가 들어있었다. 사장은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이들 부자에게 훔친 사유를 추궁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안될 일을 했다.”

그 아버지는 노모와 자식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고 있었기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가난에 고통스러워하던 아내는 가출했다. 그는 배고픈 노모와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우유와 사과를 훔친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마트 사장은 부자를 용서하며 되레 먹을 것들을 싸주었다. 체포하려던 경찰은 부자를 인근 식당으로 데려가 국밥을 시켜주면서 눈물을 훔쳤다.

마트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나이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들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 부자에게 2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고 사라졌다. 아들은 돈봉투를 되돌려주러 뒤쫓아 나갔지만 나이든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칠레에 살고 있는 교민이었다. 고국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어와 있었다. 경찰의 수소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가 말했다. “가난하고 배고파서 이민을 갔다. 못살고 배고플 때가 생각나 그렇게 했다. 자랑할 일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부동산투기를 잡겠다면서 종부세니 양도세니 하면서 온갖 억제대책을 내놓지만 별 효과가 없어 정책입안자의 고민이 심각하다. 마침내 ‘15억’ 이상 아파트 구입시에는 은행대출까지 중지했다. 정치권에서는 다주택을 보유한 고위공직자들은 한 채만 남기고 파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유했다.

먼 나라 배불뚝이들의 이야기 같다. 집은커녕 돈 몇 푼도 만져보지 못하고 배가 고파 우유와 사과를 훔친 ‘불쌍한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1800년대를 건너뛴 2000년대에도 장발장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장발장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사회와 격리되지도 않았다. 따뜻하고 온화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장발장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상황에 맞는 직장을 알선해주었고 그의 가족을 위해 먹거리를 전달했다. 그들은 고층아파트에서 세금을 빼돌리는 마귀들이 아니었고 은행대출을 악용해 투기를 일삼는 괴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빵 한 조각과 우유와 사과 때문에 가슴 찢어지도록 울어본 아버지들이었다. 그들의 포옹으로 그 아버지는 혁명을 꿈꾸는 장발장이 되지 않아도 됐다.

‘빵 한 조각’은 사회를 지배하는 불평등과 억압에 분노로 저항했지만, ‘우유 2팩과 사과 6개’는 많이 가진 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을 가르쳤고, 넉넉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온정과 나눔을 가르쳐주면서 사회를 아픈 침묵 속으로 끌어들였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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