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스코틀랜드 교회사 학술탐사를 마치고…

다시 ‘신앙의 순결’ 정신으로!

이번 필드스터디 학술탐사는 6월, 알파크루시스 University College 22명의 참여자들을 통해 이뤄진 영국-스코틀랜드 교회사 발자취를 밟는 귀한 여정이었다. 본교는 하반기 학술탐사 (11월 12일-26일, 로마-그리스-터키를 앞두고 있다.

 

01_여정의 출발

2022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학술탐사… 22명의 우리 일행은 6월 21일 화요일 14:15 Cathay Pacific항공으로 홍콩을 경유해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19로 막혔던 여행길이 풀려서인지 비행기안은 빈자리 없이 빽빽하였다.

거의 24시간 이상 비행의 여정 가운데 아무 탈없이 무사히 팀원들 모두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 6월 22일 오전 6시 15분에 도착해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 학술탐사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의 평생에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아보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복음주의 개혁교회는 중세유럽의 모든 제도, 문화, 사상과 삶의 전 영역까지 뒤흔들어 성경의 원리인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십자가의 도를 찾아갔던 종교개혁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앙의 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의 권세와 그들 사상들과 대항하여 성령님께서 간섭하시고 통치하시는 참신앙을 찾아가는 영적투쟁을 하였는데 이들이 참여한 복음주의 종교개혁교회운동은 죄인들인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영국은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에 앞장섰던 위대한 신앙을 지닌 개혁가들과 교회들의 탄생지로 하나님 영광을 위한 부흥운동의 산실이었던 나라이다.

 

02_영국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번 학술탐사의 슬로건은 ‘다시 신앙의 순결정신으로!’이다. 영국 종교개혁의 정점에 청교도운동이 있었다. 영국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여러 분파와 부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청교도라고 불린 것은 신앙의 순결을 외치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김기홍, 2019, 405)

영국 청교도운동은 사실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 독일과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운동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김상근, 2007, 175) 그런 관점에서 청교도운동의 정신은 칼빈의 신학을 수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 신앙고백서는 제일 먼저 성경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그 문서는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다. “성경을 믿고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가 아니라, 저자이고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4절 및 7절)”

 

03_영국에 대한 초기선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쳐온 나라인 영국의 초기 선교사는 그 땅의 원주민인 브리튼족 뿐 아니라 나중에 그 땅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그 땅의 주인으로 남아있는 앵글족과 색슨족의 선교역사를 포함한다고 한다.

특별히 AD 410년 로마군대의 퇴각으로 이해 그 땅을 차지한 이교도인 앵글족과 색슨족에 대한 선교의 첫 출발은 켄터베리의 성 어거스틴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비록 성령에 의한 자발적인 선교가 아니고 그레고리 1세 교황의 명령에 의한 비자발적 선교였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아 불과 7년의 짧은 사역기간 동안 켈트국의 에델버트 국왕을 비롯하여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선교단의 선교는 그들의 철저하고 모법적인 수도생활과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인한 감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선교는 복음과 확신과 함께 많은 문명적 발전을 이루는 출범이 되었다 한다.

 

04_스코틀랜드와 존 녹스

우리에게 스코틀랜드는 다소 생소한 곳이기도 하지만 개혁교회, 특히 칼빈주의 장로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하팅턴 (Haddington)에서 태어나 애딘버러 동쪽의 작은 도시 세인트 앤드루스에 있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영국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세인트앤드류스대학교 (University of St. Anderws)에서 교육받았다. 그 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가 되었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 순교자이며 개혁신작자인 조지 위샤트 (George Wishart)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존 녹스 (John Knox, 1513-1572)는 당시 스코틀랜드 국토의 절반을 소유하고 온갖 부패를 자행했던 로마 카톨릭교회 세력과 맞서며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개혁원리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의 복음주의 개혁운동은 시기적으로 비록 독일과 스위스 등에 비해 늦었으나 보다 철두철미 성경중심으로 초대 사도제도에 입각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스코틀랜드에 교회정치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교회운동은 후일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을 거쳐 오늘날 한국까지 종교개혁운동과 사상 전반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존 녹스는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노예 신세도 되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잉글랜드의 베윅 (Berwick)과 뉴캐슬 (New Castle) 그리고 런던에서도 목회활동을 하였다.

성공회 기도서 작성의 중심이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와 막역한 사이로 1552년에는 그가 주도하여 공동기도서 작성에도 깊이 참여했다가 1553년도 ‘피의 메리 (Bloody May)’때 독일로 망명했다. 프랑크푸르트의 피난민 영국교회에서 잠시 시무, 다시 스위스로 건너가 제네바의 칼빈과 함께 지내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존 녹스는 스위스에서 지내면서 세 명의 메리를 향해 ‘불결한 삼위일체 메리’라는 저항하는 글을 썼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의 부인 기스 메리 (Mary of Guise), 그의 딸로 강력한 종교개혁 반대자였던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영국의 튜더왕조 헨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의 유일한 딸 메리 (Mary Tutor)였다.

녹스는 반종교개혁도 공격했다. 1545년 로마 카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을 선언하고 개혁교회 탄압의 서막을 알린 트리엔트 공의회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 (Auguburg Confession)을 상호 용인한 종교자유를 합의한 아우구스부르크의 평화조약 (Peace of Augsburg)에 대해 신앙의 자유가 국왕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녹스는 1559년에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개혁을 도왔다. 특히 스코틀랜드 왕의 교회로 왕관모양의 종탑이 있고 자본주의 사상가 애담 스미스의 무덤이 있는 애든버러 세인트 자일스교회 (St. Giles Church)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권징조례 (Book of Dicipline, 1561)와 일반 예식서 (Book of Common Order, 1564)의 초안을 작성했다.

1560년 작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Scots Confession)를 작성했던 ‘여섯 사람의 존’이라는 인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중추인물이 존 녹스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얻게 되었고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05_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사제와 지배층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인재배출의 통로였던 대학이라는 최전방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중세의 사회환경에서는 성경에 접근이 가능했던 신분은 로마 카톨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제들이었다. 결국 이들이 성경을 통해 발견한 올바른 진리는 학문적인 도구를 통해 활발하게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운동에 대한 성경의 원리를 적극 강론하며 학생들을 양육하고 보살폈던 곳이 옥스퍼드와 켐브리지 대학교였다. 옥스퍼드 (OXFORD)–라틴어로 주님은 나의 빛 (The Lord is my life)이란 뜻을 가지고 창립된 옥스퍼드는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로 옥스퍼드셔주 (Oxfordshire County)에 위치한 대학도시이다.

1096년 쓰인 강의 기록을 토대로 건립연도를 정했다 한다. 헨리 2세가 통치했던 1167년에 당시 파리유학을 금지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며 대학 성장이 가속되었다고 한다.

옥스퍼드 도서관은 영국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의 사본과 60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보들리언 도서관)

존 웨슬리가 다닌 링컨 칼리지 (Lincoln College), 죠지 휫필드가 다닌 팸브록 칼리지 (Pembroke College), 애쉬몰린 박물관 (Ashmolean Museum), 윌리엄 텐데일의 모교 허트포드 칼리지 (Hertford College)와 ‘종교개혁의 새벽 별’ 존 위클리프가 졸업한 옥스퍼드 최초의 도서관이 있는 머튼 칼리지 (Merton College), 그를 기념한 위클리프 홀 등 모두 38개의 칼리지가 있다.  성경 전체의 최초 영어번역자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1490?~1536)도 옥스퍼드대학 출신이다.

케임브리지 (Cambridge)–옥스포드 학생과 지역주민들간의 마찰로 일부 학생이 런던의 북쪽 강 (River Cam)에 있는 켐브리지셔 주 (Cambridgeshire County)로 이동하여 1209년에 공립대학을 세웠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명성은 1502년 당시 대학들 중 최초로 세인트존스 병원 자리에 칼리지를 세운 헨리 7세의 어머니 레이디 마가렛에 의해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직 (Lady Margaret Professor of Divinity)을 도입한 이후에 영국국교회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케임브리지 출신의 종교개혁자로 영국 장로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 (St. John’s College) 출신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과 레이디 마가렛 (Lady Margaret)의 신학 교수로 근무하면서 청교도 운동을 일으켰으며 부총장까지 올라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진력하였다.

크라이스트 칼리지 (Christ’s College)는 기독교 신앙과 인문주의 사상 등을 문학적으로 승화했던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이 나온 곳이며, 찰스 다윈도 케임브리지 출신이다. 또한 미국에 하버드대학을 설립하여 믿음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한 존 하버드도 케임브리지 임마누엘 칼리지 (Immanuel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헨리 8세에 의해 설립되어 아직까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의 노벨수상자 90여명 중에 30여명 이상을 배출하였고 아이작 뉴턴, 바이런, 베이컨 등도 졸업한 대학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올리버 크롬웰이 나온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 (Sydney Sussex College),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등의 유물들과 렘브란트와 피카소의 작품이 있고 베토벤의 자필 악보는 물론 희귀한 보석과 골동품 등이 전시된 피츠윌리엄 박물관, 영국 최초로 여성 입학이 허용된 거튼 컬리지 (Girton College)와 1800만 권을 보유한 도서관도 가볼 만한 곳이라고 소개 받았다.

영국의 종교개혁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존 위클리프를 통한 역사적 종교개혁의 강력한 내재성, 옥스퍼드대학의 종교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존 코렛을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운동, 그리고 라틴어, 헬라어에 능통한 실력을 바탕으로 성경 원문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성경 진리를 향한 탁월한 이론적 소유자였던 위인들이 케임브리지에 심어놓은 강력한 종교개혁사상… 이 모든 것들이 징검다리 역할이 되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만났을 때 먼저 큰 폭발을 이루고, 또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만났을 때 청교도 신앙으로 재 폭발되어 결국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를 국교로 정할 정도로 영국 전역에 복음주의 개혁 신앙이 뿌리 내린 것이었다.

 

06_세계는 넓고 배울 것은 많고

세계는 넓고, 역사는 깊고, 보고 배울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가 처음으로 밟은 영국 땅! 내가 처음으로 호흡한 스코틀랜드의 대기! 흐르는 역사 속에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가! 그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믿음의 용장들이었다. 진리를 왜곡하고 인본주의의 거짓으로 치닫는 역사의 조류를 그들은 용기 있게 믿음으로 거슬렀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통속적 흐름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씀의 기초에 서서 성령으로 모든 것들을 분별하였다. 진리를 위해 싸웠고,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역사의 현장에서 시인하려 하였다.

‘다시 신앙의 순결 정신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코로나 19로 안심이 되지 않았고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들도 많았지만 모든 필드스터디의 여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승리의 일정이 되었다. 알파크루시스대학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세계 곳곳에 진리를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앞으로도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세계 곳곳에서 경험하고 싶다. 이로써 하나님의 시각을 품고 세계를 바라보고 싶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진리의 파수꾼이 되기를 감히 소망해본다.

 

글 / 강미영 (알파크루시스대)

 

Previous article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Next article코리아타운 특별기획 : 완벽한 비행기 탑승 위한 꿀팁 대방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