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특이한 형상을 한 선인장을 보게 되었다. 기다란 기둥 형상의 몸체가 하늘로 뻗은 그 끝에 노란 꽃이 화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밑동에서 자라나는 새끼 송이 한 쪽을 얻어 화분에 심은 것이 몇 해 전이다. 아직도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이 선인장은 날이 갈수록 기묘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집 정원은 선인장 화분만으로 한 공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이 선인장은 옆에 있는 다른 선인장들 사이에서 공간을 얻지 못하고 빈 곳으로 몸을 뉘어가더니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었는지 다시 하늘을 향했다. 2년이 지나자 모양이 ‘ㄴ’자가 되었다. 그 형상에 해마다 머리끝에 노란 화관을 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휘어진 등에 손톱만한 새끼송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알밤만 해진다 싶더니 어느새 작은 선인장 봉오리 모양이 되었다. 좁은 공간을 비집으며 ‘ㄴ’자로 휘어진 몸체가 저것들을 낳으려 했나 싶었다. 그 모양에 잠시 눈시울이 시렸다.

한 나무가 넉넉히 자라는 공간에 다른 나무를 심은 적이 있다. 대체로 두 나무 모두 잘 자라 주었는데, 가끔은 그렇지 못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살아 내려는 기운이 약한 쪽이 강한 쪽에 비해 힘에 부쳐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원에 직육면체 모양으로 다듬어 키우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밑동 쪽이 날씬한 모양이었는데, 그 때문에 빈 공간이 좀 있어 보여서 그 옆에서 자라고 있던 잡목을 그대로 두었다. 그랬더니 석류나무가 비실비실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손을 대보니 쉽게 가지가 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결국 갈색으로 변해 말라버리고 말았다.

정원 한 곳에 극락조가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자라고 있다. 남태평양 뉴기니어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일대에 서식하는 새들 중 하나가 극락조인데, 이 꽃나무가 그 새 모양을 닮았다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정말 새 모양처럼 주홍빛, 흰빛, 진보라로 어우러진 모양새가 제법 우아하다.

이 극락조 무리 사이로 그 옆에 서 있던 등나무가 손길을 뻗어 왔다. 공간을 틔어줄 겸, 극락조 몇 그루를 캐어 테라스에서 한눈에 내다보이는 곳에 옮겨 심었다. 기왕이면 더 모양 좋게 키워 번식시켜 보려는 욕심도 있었다. 옮겨 심은 극락조는 과연 한 해 두 해,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는 새를 닮아갔다.

안타까운 것은 원래 자리에 있던 극락조 무리다. 남의 몸을 타야 지탱이 잘 되는 등나무가 극락조의 몸을 휘감아 어느새 극락조의 기운을 꺾어놓고 말았다. 극락조는 점점 가지 수가 줄어들더니 지금은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민 초기, 한 상가건물에 한인상점이 생기면 먼저 있던 다른 현지인 상점에서 바짝 긴장한다고 했다. 한인들의 근면성실이 그만큼 소문나 있었던 것이다. 업종이 다른 상점은 어쩌면 새로 생긴 한인상점 덕을 보기도 했을 것인데, 업종이 엇비슷한 경우는 대개 그 한인상점의 기세에 눌려 매출이 격감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 건물에 또 다른 한인 상점 하나가 더 생길 때 벌어진 현상도 흥미롭게 전해진다. 처음에 다른 상점들은 더욱 크게 긴장을 했단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느긋해지더란다. 왜냐하면, 한인 상점끼리 과다경쟁을 하다 서로 손해 보는 사이 기존의 상점들이 반사이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실제 장사를 해보지 않아도 한인 사회에서 흔히 접하는 뉴스다.

그런 뉴스를 들을 때면, 우리 집 정원을 떠올린다. 두 나무가 하나가 되어 자라는 동백나무 얘기다. 두 나무는 처음에 따로따로 분홍꽃과 흰 꽃을 피우는 나무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몸이 커져서 옆 나무에 해를 끼칠 정도가 되자 아예 서로 몸을 붙이고 마치 한 몸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각각의 빛깔로 꽃을 피우는데 떨어져서 보면 한 나무에 두 빛깔의 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것 같다.

좁은 땅에서 서로 죽지 않고 함께 살려 하다 보니 둘이 하나 되었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할까. 요즘 한인 사회는 옛 이민시절처럼 미친 듯이 경쟁하는 풍조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간간이 알 수 없는 경계심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테라스를 통해 우리 집 정원을 넘어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진 숲을 바라보곤 한다. 숲을 이루는 무수한 나무들도 저 속에서 날선 투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나무는 대개 그 투쟁에서 이긴 것이겠지만, 실은 그것만이 아닐 수 있다.

극락조 군락을 망가뜨린 등나무를 두고 생존경쟁에서 이긴 힘을 찬양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남의 공간을 다치지 않으면서 제 몸을 뉘어가며 생존을 유지해 그 휜 몸 위에 또 다른 생명을 업어 키우고 있는 선인장도 있다. 부족한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적대감을 서로 몸을 합친 동지애로 극복해낸 동백나무도 있다.

그런 나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늘도 세상살이의 이치와 지혜를 배운다.

 

 

글 / 최옥자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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